월간 문익환_12월 <통일꾼 늦봄>
[시 속의 인물] 10. 동아투위 안종필 위원장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그의 간은 감옥에서 병이 들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민족 수난사의 한 토막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지 못하고
정의와 사랑의 부름에 머리를 쳐들었다가 당한 죽음입니다
(문익환 시. 「안 동지의 죽음 앞에서」)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 자유언론실천선언
늦봄은 1980년 3월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이었던 고 안종필의 장례식에서 그를 ‘안 동지’라 부르며 시로써 애도했다. 그의 몸과 그의 한이 흙에 묻히고, 못다 한 그의 소원도 흙으로 풀려 역사에 묻혀서 역사의 거름이 될 것이라며 추모했다.
1974년 독재정권의 언론 통제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3월)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정권은 12월부터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기자들의 투쟁에 탄압을 가했다. 그러나 깨어있는 독자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투쟁을 응원하는 독자들의 격려 광고가 75년 3월까지 1만여 건이나 게재되었고 성금도 약 1억 원이나 모였다. 늦봄은 여섯 번째 수감 중이던 92년 편지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75년의 꽃은 누가 뭐래도 동아일보 광고란을 메웠던 겨레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뜨거운 마음이었죠. 겨레의 하나 된 믿음이요, 사랑이요, 희망의 분출이었죠. 우리 민족사에 가장 빛나는 한 장이었죠. (옥중편지 1992. 2. 15.)
광고주 압력에 독자들의 격려광고
늦봄 가족은 이때의 광고 사태를 축제처럼 여기고 동참했다. 아들 문성근은 대학에서 연극반 친구들과 돈을 모아 짤막한 의견 광고를 냈다. 늦봄은 책 광고를 할 수 있는 지면을 사서, 아직 출간도 안 된 책을 빨리 써서 내고 싶다는 내용의 광고를 냈다. 실제 출간한 책 『새 것, 아름다운 것』이 나왔을 때는 더 이상 광고 게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회사 측은 130여 명의 기자를 해직했고, 5월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국민의 입과 귀를 막는 암울한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76년을 맞이하는 나는 온 겨레와 함께 암담하기만 했었죠. 장준하 씨는 죽고 말았고, 동아일보 광고란에서 불타오르던 민의 민주 열망도 동아일보 사주 측의 배신으로 수그러들었고 언론자유를 수호하려던 기자들은 쫓겨나고, … (옥중편지 1992. 2. 21)
안종필 편집부 차장도 이때 쫓겨났다. 3월 17일 기자들이 쫓겨난 후 그는 기자협회 동아일보 임시 분회장이 되었고, 이날 결성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자유 언론 실천을 위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한 뒤 자신도 해고되어 길거리로 내몰린 것이었다.
민주-인권 사건일지로 구속 1년 옥고
77년 5월 안종필이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이 되면서 해직 기자들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2월 30일 조선투위 기자들과 함께 ‘민주 민족언론 선언’을 발표, ‘민주 언론은 민중의 아픔을 같이하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78년 10월 24일 동아투위는 4주년에 맞추어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 사건 일지(민권일지)’를 동아투위 소식지에 실어 배포했다. 민권일지에는 77년 10월부터 78년 10월까지 1년간의 알려지지 못한 민주화 운동과 언론의 왜곡 보도 등이 담겼다.
이 사건으로 안종필을 비롯한 9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운명에 처했다. 안종필은 법정에서 “사람은 듣고 보고 말하지 못하면 미치고 맙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자유언론이 보장되지 않으면 썩고 미치고 맙니다”라며 ‘언론 자유는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안종필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약 1년 복역 중 10.26 사건으로 12월 4일 석방되었다.
석방 3개월 만에 간암으로 세상 떠나
그러나 석방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청천벽력처럼 병원 검진에서 간암이 확인됐고 석방 후 3개월이 지나지 않은 80년 2월 29일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절망이나 두려움 없이 의연했던 그는,
“(언론사를 포함한 모든) 언론인들은 언론의 자유가 결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라는 극히 상식적인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해동 목사 “그의 죽음은 병사 아닌 타살”
77년부터 그가 부인과 함께 다니기 시작한 한빛교회의 이해동 목사는 그의 장례를 집례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 안종필 위원장의 죽음은 ‘병사’가 아니라 ‘타살’이고, ‘자연사’가 아니라 ‘(자유언론 실현을 위한)순직’입니다.” 2년의 감옥 생활로 인한 병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5·17 때 안기부로 연행된 이해동 목사는 장례식에서 타살이라고 한 말에 대해 집요한 추궁을 받았으나, 순직과 타살이라는 자신의 판단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고 끝까지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박용길의 편지. 고 안종필 위원장 일주기를 맞아 추도예배와 묘비 제막식에 갔고
자녀들이 대견스러웠다고 썼다.
한빛교회 장로였던 늦봄의 아내 박용길도 안종필과 동아투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박용길은 늦봄이 1차 수감 중이던 77년 12월 30일 동아투위 망년회에 참석했는데 도중에 갑자기 집으로 가보라는 연락을 받고 급히 돌아와 31일 새벽 예고에 없던 늦봄의 석방을 맞았다. 다음은 늦봄에게 보낸 박용길의 편지다.
오늘은 아침에 재판에 가서 우리 교인 안종필, 박종만 집사 만나고… (1979. 8. 8)
안종필 님이 가신 지도 한 돌이 되어가는군요. (1981. 2. 24)
(3.1절 기념) 예배를 마치고 일산 묘지에 뻐쓰로 갔습니다. 안종필 위원장의 일주기 추도 예배와 묘비 제막식이 있었는데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1981. 3. 1)
◇ 1979년 12월 석방된 인사들과 함께한 한빛교회 성탄예배. 함께 석방된 안종필 위원장은 말기 간암으로 원자력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함께하지 못했다.
‘안 동지는 땅의 거름으로 다시 피어날 꽃’
늦봄은 안 동지의 장례식에서 그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땅의 거름’이 되어 ‘다시 피어날 꽃’이라며 희망의 의미를 담아 추도했다. 그리고 반드시 새날이 올 것을 확신했다.
우리는 그 새날의 문턱 앞에 묘비를 세워야 합니다
‘여기 자유 언론을 위해 살다가 간 한 사람이 누워 있다’고
동아투위는 그를 기리기 위해 1987년부터 ‘안종필 자유언론상’을 제정하여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고 언론의 정도를 걷는 이들에게 시상해 오고 있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다산책방
오픈아카이브.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이야기」.
미디어오늘. 🔗「동아투위 명예회원으로 함께한 38년」.
한국기자협회. 🔗「생사의 갈림길에서 의연했던 안종필」
안 동지의 죽음 앞에서*
문익환
안 동지는 그냥 살고 싶어 했습니다
푸른 하늘을 숨 쉬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는 강물처럼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습니다
깨끗하게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안 동지는
그만야 가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살고 싶은 그의 애타는 소원마저도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이란 이렇게 무정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이미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자연법칙이란 이렇듯 냉혹하군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군요
흙에서 난 몸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의 몸과 함께 그의 한도 흙에 묻혀
민족의 한에 합류하는 거군요
못다 산 그의 소원도 흙으로 풀려
민족의 염원에 묻히는군요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히는군요
역사에 묻혀 역사의 거름이 되는군요
한국 언론 수난사에 묻힌 그의 죽음 앞에서
지금 우리는 울고 있습니다
가슴 메어 울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광고란에 쏟아지던 폭포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이 땅의 온갖 오물을 씻어 내리면서
백발이 되도록 살면서 좋은 일 많이많이 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
그런데 젊은 나이에 허리가 잘려 죽는 죽음이 더 큰 일을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전태일이나 김상진의 죽음이 그런 죽음 아닙니까
안 동지의 죽음은 그렇게 찬란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아픈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의 간은 감옥에서 병이 들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민족 수난사의 한 토막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지 못하고
정의와 사랑의 부름에 머리를 쳐들었다가 당한 죽음입니다.
외치다가 부서진 이름입니다
죽음으로 양심을 일깨우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아닙니다
빛으로 터져 나올 어두움입니다
그냥 땅의 거름입니다
맑은 목소리로 다시 피어날 꽃입니다
이제 새날은 오고야 맙니다
우리는 그 새날의 문턱 앞에 묘비를 세워야 합니다
‘여기 자유 언론을 위해 살다가 간 한 사람이 누워 있다’고
그는 한국 언론의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건너다보기만 하고 죽어야 했던 모세였습니다
이렇게 안 동지는 꼭 죽어야 할 자리와 때를 받았습니다
이런 죽음을 윤동주는 행복한 죽음이라고 했더군요
한국 언론 수난사에 비석이 하나 꼭 필요한 시점에 와서 죽었기에
나도 당신의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런 죽음은 죽고 싶어도 허락되지 않는 일이 있는 걸 알기에
나는 당신의 죽음을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죽음만이 보여 주는 당신의 순수를 배신하지 못할 겁니다
어쩌는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죽음을 살아야겠습니다
죽음으로 산 당신의 자유 언론으로 부활해야겠습니다
당신의 순수 앞에서 양심을 닦으며 손잡고 전진하겠습니다
민주와 자유와 진실의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그 고지에 정의의 깃발을 꽂기까지
* 동아투위 위원장 안종필님 장례식 설교
** 모세가 약속한 땅 가나안을 건너다보며 죽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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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익환_12월 <통일꾼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