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삶을 만든 봄길의 내면 성정(性情) 3가지
담대함과 낙천적 성격, 꼼꼼함
“신랑이 신부의 방으로 들어가듯 감옥으로 가게 하라. 두려움은 작게, 기대는 크게 지니고서.” 봄길은 생전에 간디의 이 글귀를 붓글씨로 써서 거실 벽에 늘 붙여놓고 있었다. 늦봄으로부터 방북하겠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근심을 갖지 않았던 봄길의 내면 성정을 짐작하게 하는 글귀가 아닌가 싶다.
◇ 직접 쓴 간디 명언 앞에서
민주화를 위한 험난한 길을 걷고 통일을 향한 무거운 짐을 짊어졌던 자신의 평생을 그토록 성공적인 삶으로 꿋꿋하게 지켜낸 봄길의 내면 성정은 어떠했을까? 대략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가 담대함이고 다음으로 낙천적 성격과 꼼꼼함이다
담대함
남편이 겪은 감옥, 나도 체험하겠다
‘담대하다’는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하다’의 뜻이다(표준국어대사전). 비슷한 낱말 ‘대담하다’는 ‘담력이 크고 용감하다’는 뜻이어서, 담대함은 큰 뜻을 위해 거침없이 용감하게 나아가는 굳은 의지 정도로 이해해도 되겠다. 그런 담대함이 가장 먼저 짚어야 할 봄길의 성정이다.
봄길은 늦봄이 걸어간 통일꾼의 길을 이어 걸었다. 3.1민주구국선언 이후부터 18년 중 10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늦봄을 뒷바라지하며 자신도 민주와 통일 운동 최일선에 참여해 왔지만, 늦봄 사후에는 그가 했던 일을 봄길이 직접 떠안았다. 우선 늦봄이 별세하기 불과 10일 전에 갓 출범한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 모임(통일맞이)’의 대표를 맡아 이후 남북을 넘나들며 통일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1주기를 맞아 봄길은 방북을 결심했다. 방북 후 귀국 시 투옥될 것은 예견된 상황이었지만, 불편한 남북관계의 회복에 도움 되는 가교 역할을 함과 동시에 늦봄의 장례에 북한이 조문한 데 보답해야겠다는 그의 각오는 단단했다. 투옥 걱정 대신 오히려 남편의 11년 감옥살이를 자신도 체험해 보는 것과 함께, 법정에서 재판 받고 온종일 수갑을 차는 고통을 느끼는 것을 겪어보길 원했기에 평양행을 자청했다.
방북 후 서울로 돌아올 때 봄길은 총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38선을 건너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겠다고 우겼다. 함께 방북했던 정경모 선생은 돌아가신 문 목사님의 ‘갈 테야’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시겠다는 뜻이 아니었겠느냐고 회고했다.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서 38선은 없다고 소리치면서 임진강을 건너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겠다’던 문 목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아주머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소이까(정경모 2012).
1989년 3월 늦봄이 방북을 결행하게 된 것도 봄길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연유도 있었다.
지난 3월 19일 저녁 종로 4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동지들이 떠나는 걸 반대하기 때문에 떠나는 일을 연기해야 하겠다고 했더니 “난 이제 당신을 못 믿겠어요” 하며 인사도 하지 않고 혼자 집으로 돌아갔었지요. 그 분노가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느냐는 건 나만이 아는 일이지요.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문익환이 오늘의 문익환이 된 것은 박용길의 덕이라고 해도 되죠(옥중편지 1989. 10. 20).
때로는 봄길이 늦봄보다 더 용감했다. 한번 옳다고 생각한 일이라면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었다. 청혼할 때 늦봄이 ‘나의 채찍과 거울이 되어달라’던 부탁에 대한 아내로서의 답변이기도 했다(정경아 2012).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개월을 살더라도 늦봄과 결혼하겠다고, 그마저도 안된다면 평생을 전도사로 혼자 살겠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늦봄과의 결혼을 이뤄냈다. 담대함은 통일꾼 늦봄만의 성정이 아니었다. 봄길도 그랬다.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 및 열사정신계승 6월항쟁 기념대회에서 영정을 든 유가족들의 행진(1994. 6. 11)
낙천적 성격
38선 넘는 순간에도 태평하게 아침 식사
봄길은 매우 낙천적이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남들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거라는 일도 즐겁게 행하는 성격이었다. 늦봄이 처음 감옥에 가게 되었던 때의 심정을 묻는 말에 “전혀 겁이 안 났고, 당당했다”고 대답했다. 재판 후 음식점에 모인 자리에서 구속자 부인들이 모두 깔깔거리며 농담을 하는 밝은 모습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유명하였다. 그는 아무 데서나 등을 붙이면 잠이 들었다(문영미 2012).
봄길에게 이미 오래전 태평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었다. 만주 신경에서 서울로 피난민 500명과 내려올 때였다. 38선을 넘는 날에는 꼭두새벽부터 출발했다. 선두에서 38선을 넘은 늦봄이 그를 찾았으나 도무지 보이지를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한참을 오니 그가 38선 근처 언덕에서 몇몇 사람들과 모여 앉아 도시락을 꺼내 밥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큰아들 호근을 임신하고 있던 그는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아침을 먹은 것이었다. 그 후로는 38선에 앉아 밥을 먹은 사람이라고 평생 놀림을 당했다(문영미 2012).
봄길과 함께 오랫동안 한빛교회를 섬긴 유원규 목사는 ‘우리 교회에서 제일 느리게 식사하는 분이 장로님이었다며, 평정심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서두름이 없는 분, 싸워서 열을 얻기보다 싸우지 말고 하나를 이루자고 하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정경아 2020).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자세를 가졌던 봄길의 평정심과 담대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지내온 그의 집안 내력, 부모의 계몽 활동을 보며 자란 어린 시절, 서울과 일본 유학을 거치며 다져진 민족의식이 그 기초일 것이다. 또한 실천적 기독교 신앙으로 뭉친 늦봄과 함께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의 곤란을 이겨내고 1960~70년대 폭넓은 목회 활동과 사회 활동을 거치며 너그러우면서도 강인한 여성 지도자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거제도 피난시절 어린 자녀들과 손님을 환송하고 있는 박용길(1950년대 초)
꼼꼼함
촘촘한 기억력 + 세세한 기록광
봄길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났다. 촘촘한 기억력만큼이나 어떤 일이건 꼼꼼하고 정확하게 챙겨 진행하는 데 능숙했다. 그가 보관하고 남긴 수많은 기록이 그 꼼꼼함을 증명해 준다.
우선 인생의 여러 부분을 정리한 기록이 있다. ‘상 벌’ 제목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받은 상 다섯 개를 적어놓은 기록에는 어머니와 문성근을 위해 만든 토끼해 윷판이 신문사 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적혀있다. ‘나의 봉사 활동’ 제목으로는 동창회, 새가정사, 한빛교회, 기독교장로회 등 자신이 활동하며 봉사했던 15개의 단체를 열거해 놓고 있다. 달력 뒷면을 활용하여 출생부터 결혼까지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것도 남아있다.
◇ 봄길이 받은 상을 기록해 둔 원고지
본격적인 사회 활동하면서 만든 해바라기회, 코스모스크럽, 공립상조회 등의 모임을 하며 모임 일지나 회원 명단, 회비 납부 명세 등을 길게는 8년간이나 꼬박꼬박 기록하여 남겨 놓았다. 목요기도회와 갈릴리교회, 평신도대회에서 활동할 때도 예배의 순서나 모임 상황, 참여자나 기부자, 비용 지출 증빙 등을 반듯하게 정리해 놓았다.
◇사회봉사 모임 '코스모스 크럽'의 회비 납부 명세를 적은 기록
월간 문익환_10월 <봄길 박용길>
특히 1975년부터 20년 가까이 운영한 갈릴리교회는 1983년부터 늦봄이 목회를 맡았는데 잦은 옥살이로 인해 봄길이 운영 책임을 지면서 주보 준비와 설교자 섭외, 회계 등을 늘 그가 도맡아 진행했다. 그가 꼼꼼하고 세심하게 헌신적으로 일한 덕분에 갈릴리교회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대표적 교회로 운영될 수 있었다. 봄길이 남긴 모든 기록은 민주화운동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 박용길 장로가 쓰고 오려 붙인 갈릴리 교회 주보들
문동환 목사는 봄길이 ‘평생을 오직 진실과 정의와 사랑에 매여 굽힘이나 꺾임 없이 한결같이 올곧게 사셨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성공한 삶’이고 ‘구김 없이 힘차고 아름다웠’다고 추모했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영미 (2012). 「늦봄과 봄길의 한결 같은 길」 『봄길과 함께』. (사)통일맞이
정경모 (2012). 「38선 넘는 박 여사 손에 들린 북쪽탄원서」 『봄길과 함께』. (사)통일맞이
문동환 (2012).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아주머니 봄길을 기리다」 『봄길과 함께』. (사)통일맞이
정경아 (2020). 『봄길 박용길』. 서울: 삼인
문익환 옥중편지 (1989. 10. 20)
월간 문익환_10월<봄길 박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