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하나도 답답하지 않아…
눈만 감으면 무한공간에 앉아 있는 거니까"
봄길과의 편지통해 읽고 또 쓰고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서 바쁘게 읽고 또 썼다. 감옥에서 도착한 그의 글은 외형은 봉함엽서에 담긴 편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시와 노랫말이 있고 작품에 대한 감상도 있었다.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감옥 안에서도 미적·예술적 영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수감 중에도 끊이지 않았던 문화생활 덕분이었다. 거기에는 박용길 장로가 하루가 멀다고 보낸 편지의 공이 가장 컸다.
시인이기도 했던 문익환 목사는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자주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악보를 보며 노래 부를 수 있었다. 박용길 장로의 매일 보낸 편지는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예술적 감수성을 잃지 않는 자양분을 제공했다. 갇혀있던 문익환 목사에게 박용길 장로의 편지는 세상과 통하는 창이었고, 고립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김병민, 2019)
◇박용길 장로가 직접 그린 다양한 장르의 노래 악보들. 박용길 장로는 음악을 좋아하는 문익환 목사를 위해 악보를 직접 그리거나 인쇄된 것을 잘라 붙여 편지와 함께 보냈다.
찬송가 곡조에 노랫말 새로 지어 불러
▲음악
음악 애호가인 문익환 목사는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훈의 내한 공연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공연 실황을 비디오테이프로라도 감상하고 싶어 했다. 옥중편지에서는 음악가인 맏아들 호근, 며느리 은숙에게 음악에 관해 진지하게 조언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미 있는 찬송가 곡조에 노랫말을 새로 지어서 부르기도 했다.
이모님께
명훈이는 모스크바나 파리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피아노 음악, 교향악을 뛰어넘어 서구의 민중음악인 오페라를 정복했군요. 정말정말 장하구 장하구 또 장한 일입니다.
녹화가 될 텐데 비디오 테이프를 들여보내 주시면 여기서 보고 싶습니다. 꼭 부탁합니다. 오랜만에 용길이와 동기의 정을 한껏 누리세요. 호근이가 신명을 바치는 민중 음악을, 민중 예술을 보고 듣고 갈 기회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럴 기회가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봄길의 늦봄 올림 (문익환 옥중편지, 1990.07.11)
◇열독허가증이 붙어있는 『민족예술』 1990년 제3호. (교부일 1990. 9. 14)
◇공주교도소에서 작사한 <고마운 사랑아>와 1983년 고난주간을 앞두고 서울구치소에서 작사한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박용길 장로 글씨). <고마운 사랑아>는 후에 작곡가 류형선이 가사에 곡조를 붙였다.
조카 문영미 그림 특히 좋아해
▲그림
그림에 관해서는 박용길 장로가 편지지로 활용하기도 인쇄된 그림 외에도 직접 그린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특히 조카 문영미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새 작품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애정 담긴 협박과 함께 그림을 의뢰하기도 했다.
영미에게
보내준 그림 두 장은 벽에 붙여 놓고 늘 감상하고 있다. 사람의 복잡 미묘한 내면을 화폭에 올리면
이렇게도 되는구나 하면서 무언가 느끼려고 하는데, 좀 더 시간을 들여 감상해야 하겠지만
현재 내 느낌으로는 좀 더 자유분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보라색을 많이 써서 그런지 상당히 이색적인 느낌이 드는 그림이라고 느끼고 있다. 수채화를 한 장 보내 주었으면 정말 고맙겠다. 어제 신년 카드를 받고 기뻤다. 크리스마스인데 카드 한 장 안 보내 준다고 조금은 노여웠는데, 이제 다 풀렸다. 아빠 엄마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도 남는다.
큰 아버지 (문익환 옥중편지, 1982.01.17)
영미야
…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바쁘겠지만, 간단한 스케치라도 좋으니, 그림 한 장 보내라. 큰아버지 특청인데, 모른 척했다가는 다시 큰 아버지를 못 볼 줄 알아라. 영감의 샘 구멍이 막혔니? 큰아버지 특청이 그 막힌 영감의 샘구멍을 트는 계기라도 된다면, 그 어찌 안 좋으리오가 아니겠니? 붓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나의 따분한 심정을 탁 터 주려무나.
큰 아버지 씀 (문익환 옥중편지, 1991.09.09)
◇ 조카 문영미가 감옥으로 보낸 해바라기 그림. 그림 사방에는 감방 벽에 붙인 흔적이 남아있다.
「한겨레 신문」 읽고 떠오른 영감으로 시집 출간
▲시
다섯번째 수감부터 받아 본 「한겨레 신문」은 문익환 목사의 문화생활에 커다란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시를 찾기 위해 신문광고란까지 샅샅이 살펴볼 정도였고, 신문에서 인상적인 소식이나 작품을 접하면 당사자에게 주저 없이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얼마나 즐겨보았으면 신문을 읽고 떠오른 영감들로 시를 지어 다섯 번째 시집을 출간까지 할 정도였다.
박재동 화백께!
박 화백의 그림판 안 좋은 게 없지만, 어제의 그림은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림 보기)
어느새 5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올림픽뿐 아니라 모든 운동의 월계관인 마라톤 우승대에 올라서서 차마 웃을 수 없었던 선수, 쏟아지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고개를 떨어뜨린 비통함이었죠.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어린 후배가 태극기를 달아 주는 그림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그는 민족 양심도, 민족애도 없는 사람이죠.
… 이렇게 해서 젊은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가 정권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겨레에 봉사하게 되는군요. 이 어찌 유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다시 “통일은 다 됐다”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안동교도소에서 만세를 부릅니다.
그 순수한 마음으로 좋은 ‘그림판’을 계속 신나게 그려 주세요, 고맙습니다. 그런 그림을 그리도록 영감을 준 손기정 선배와 황영조 후배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물론 그 두 분에게 감사해야 하지만 박 화백께도 감사합니다. 이 감사 받아 주세요. 안동에서 문익환 드림 (문익환의 옥중편지, 1992. 8. 12)
동주 형!
형은 시집 한 권 남기고 갔는데, 난 다섯번째 시집을 내게 되었군요. 꼭 죄를 얻은 것 같은 심정이군요.
… 감옥에서 신문을 읽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형은 상상도 못 할 거로구만. 그냥 꿈만 같은 이야기죠. 그리고 집필 허가가 나서 시상이 떠오를 때 얼마든지 이를 쓸 수 있다는 게 어떤 일인지 이건 아마 형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시상이 떠오르는데 쓸 수 없다는 거, 이건 고문이라는 거. 그래서 난 「한겨레 신문」을 펴놓고 거기 어디에 시가 없나 하고 날마다 찾았거든요. 신문 광고란까지. 그런데 시가 없는 날이 없었어. 정말 놀랍고 고맙더군요.
(문익환 시집 『옥중일기』 - 책 머리에: 다섯 번째 시집을 내면서, 1991)
◇ 문익환 목사의 다섯번째 시집 『옥중일기』 (1991)
감옥이라는 특수한 환경은 요즘처럼 스마트폰을 통해 감당하지 못할 양의 문화콘텐츠를 맞닥뜨리는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환경이다. 예고 없이 스마트폰을 빼앗기는 상황을 상상해본다면 심리적으로는 비슷한 망연함과 막막함을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좁은 공간과 외부와의 제한적인 소통은 문익환 목사가 문화생활을 즐기는 데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무한히 펼쳐지는 세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작은 소재거리도 큰 울림이 되는 그만의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성근아
… X평방(방 크기 검열에서 삭제) 하나도 답답하지 않다. 눈만 감으면 나는 무한 공간 안에 앉아 있는 거니까. 무한 공간에 가득한 氣를 마시는 나의 자유와 특권을 내게서 빼앗아 갈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문익환 옥중편지, 1991. 6. 11)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참고문헌]
김병민(2019). 「매일 감옥으로 보낸 편지」 『사랑의 기록가, 박용길』. 통일의집
월간 문익환_8월 <옥중의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