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8월 <옥중의 늦봄>

[이달의 기억, 기록] 1975년 장준하 장례식 ‘네가 하려다 못한 일 내가 해 주마’ 결심

[8월의 문익환]   


▲1946년(29세)
8월에 북만주 신경에서 서울로 남하. 막대한 돈을 써서 500명에 이르는 피난민을 이끌고 봉천(현재 심양)까지 기차로 이동, 이후 걸어서 신의주, 사리원을 거쳐 38선 통과. 늦봄은 서울에서 잠시 머무르다 곧 부친의 목회지인 김천으로 내려가서 배영중학교 영어교사로 봉직

▲ 1949년(32세)
8월 25일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남

◇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 문익환 목사


▲ 1954년(37세)
전쟁 중 머물렀던 도쿄에서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서 프린스대 신학 석사 과정을 공부. 1952년 가을부터 함께 살던 아내와 아이들은 서울로 귀국

▲ 1975년(58세)
8월 17일. 해직 교수들이 만든 특수 교회인 ‘갈릴리교회’ 첫 예배. 8월 17일 장준하 사망. 21일 명동성당 장례식에서 조사(弔詞)를 함. 장준하를 묻으며 ‘네가 하려다 못한 일을 내가 해 주마’라고 결심

◇ 통일의 집에 전시 중인 장준하 선생 영정, 장례식에서 참배하는 문익환 목사(오른쪽에서 두번째)


▲ 1980년(63세)
5월17일 내란예비음모죄로 구속된 후 8월 4일에 용산 국방부 군법회의에서 첫 재판 시작

▲ 1990년(73세)
8월 8일, 북한 중앙인민위원회가 해방 45주년을 맞아 조국통일상을 제정하여 늦봄을 수상자로 결정

▲ 1993년(76세)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을 맡음.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4차 범민족대회는 7월30일 남측추진본부를 결성, 8월14일 한양대에서 행사 개최

월간 문익환_8월 <옥중의 늦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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