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6월 <늦봄과 6.25>

🈷️ Timothy Moon을 아시나요?

[전쟁과 Timothy Moon]


 

Timothy, 한글로는 디모데

▲전쟁 전 늦봄이 보낸 편지

1950년 5월 말, 늦봄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기말시험을 마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문익환 1950. 5. 30-31). 프린스턴으로 유학을 떠난 지 1년 가까이 되던 때였다. 편지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자 가족을 그리워하던 늦봄의 모습이 가득하다. 특히 그해 봄에 태어난 셋째 아이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애기만 같던 용길이 어느새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이 “생각하면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 편지는 자신과 동생의 성경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Scoville 목사님의 보장서와 동환의 Bible name “Stephan”도 인제는 다 들어갔겠지요? 좀 조용한 편인 나에게 Timothy, 좀 열정적인 동환에게 Stephan 참 잘 어울리는 이름들이라고 생각하오.”
 
◇1950년 5월 30-31일, 문익환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Timothy’, 한글로는 ‘디모데’라고 하는 그의 영어 이름은 문익환의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의 미국인 동생, 스코빌(Gurdon Scoville) 목사가 지어준 것이다(문재린, 1976).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제자로 신약성경 디모데서는 바울이 옥중에서 디모데를 격려하려고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다(딤전 1:2). 늦봄이 쓴 편지 내용으로 보건대 그는 자신의 영어 이름에 흡족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1950년 이후 사용했던 것이 분명한 이 영어 이름은 늦봄의 체취가 배어 있는 남겨진 기록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익환 목사 Timothy Ikwan Moon가 받은 프린스턴 대학교 석사학위증을 넣어놓은 액자
 
이 편지는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를 “조선”이라고 칭한 대목을 읽으니 일제시기에 태어나 1948년 새로운 정부가 세워진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던 1949년 여름, 유학길에 나섰던 늦봄이 떠오른다.
 
“아마 지금쯤 조선은 퍽 덥겠지요. 이곳은 금년은 특별하다고는 해도, 아직도 퍽 건들 건들한 공부하기 좋은 날씨요. 얼마 쉬고는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해야겠오. 위해서 늘 기도할 줄 믿소. 보고싶은 사람 씀. ”
  
 

신학생 늦봄, 유엔사령부에 지원

▲참전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

5월 말 편지를 보낸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의 신학생이었던 Timothy Moon은 가족과 조국에 보탬이 되고자 유엔사령부에 자원했고 미군의 통역관이 되었다. 이 소식은 미국 지역 신문에 실렸고 박용길이 남긴 딸 영금의 육아일기에는 이 날의 신문이 스크랩되어 있다. 

 
◇2021년 개최된 “땅의 평화” 전에서 전시된 전쟁 참전 기사 모습 
 

휴전 회의록 통역사 명단서 발견

▲휴전회담 회의록 속의 T Moon

문익환 목사가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회담의 통역관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늦봄 아카이브에는 전쟁 시절 늦봄과 늦봄가족의 기록들이 상당수 남아있고 2021년 “땅의 평화”전시를 통해 이를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전쟁 중 도쿄의 유엔극동사령부에서 일하던 늦봄이 제주도로 피난을 가 있던 가족과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동안 얼마나 괴롭고 분주한 생활에 쪼들리고 있소? 생각하면 안타까운 것 뿐이나, 조선 민족 전체가 당하는 일이매 어찌할 수 없는 일인가 하오. 하루 빨리 조선 땅에서도 평화의 노래가 마음껏 불려져야 할 텐데. 전쟁은 점점 더 도가 심해가고 있고, 언제 끝날지 전연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한 것 뿐이오. …. 이렇게 동경에 와 걸려 있으면서 만날 수 없고 조금도 도울 수 없는 안타까움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오….. (문익환 1951)


전쟁을 겪는 참담한 심정과 염려를 담아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는 한편 문익환은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 전쟁 시기 통역관으로 일했던 그의 공적 행적 일부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로 제공되고 있는데 약 900건의 휴전 회의록을 찾아볼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자료해제에는 유엔-공산군 쌍방 대표명단을 제시하고 있는데 통역 장교로는 미해군중위 호레이스 C. 언더우드(Horace C. Underwood), 미육군중위 리차드 F. 언더우드(Richard F. Underwood), 미육군준위 케네스 우(Kenneth Wu) 3명이 대표로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회의록 안을 들여다보면 보다 많은 인물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문”도 그렇다. 문(Mr. T Moon)은 DAC 소속으로 1952년 3월 11일, 25일, 27일 자 참모장교회의의 통역사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 “휴전회담회의록 6 : 제2의제와 제3의제에 관한 참모장교회의 1952. 3. 25.” ©국사편찬위원회


『휴전회담회의록』은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휴전회담 기록 가운데 유엔군-미군 측이 작성·유지한 가장 정확한 공식문서이다. 이 자료는 미국 국립 기록관리청(NARA)이 소장하고 있는 문서군(Record Group 333)에 속해 있었으며 원 제목은 “1951-53년간 유엔군사령부 한국 휴전회담(United Nations Command, Korean Armistice Negotiations, 1951-1953)”이다. 작성 당시 비밀등급이 부여되었으나 비밀해제되어 공개된 것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본을 수집해 『남북한관련사료집』 제1집-10집(1994)으로 간행하였고 온라인 서비스는 이를 저본으로 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 “3월 11일자 회의록 원문 이미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전쟁 속 그의 이름은 Timothy

▲둥근 달님, Timothy, 늦봄….. 이름이 말해주는 것

태어나 평생 하나의 이름을 갖고 살기도 하지만 문익환은 누구보다도 여러 이름을 갖고 살았다. 이름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필터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Timothy Moon으로서 문익환의 모습을 읽었다. 이 이름으로 그는 치열한 학문과 전장에서 살았다. 이때의 경험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가 어떻게 우리가 아는 “늦봄 문익환”이 되었는지 알려면 Timothy Moon 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보아야 할 것이다.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삼 년 묵은 아키비스트로 늦봄과 봄길의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다.
 


월간 문익환_6월 <늦봄과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