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6월 <늦봄과 6.25>

🈷️ 분단의 현장 판문점에서 유엔 통역관으로 휴전을 통역하다

[미국신문에서 찾은 늦봄의 6.25 참전기]

전쟁으로 조국이 존망의 위험에 처했는데
가족 생사는 알 길이 없고, 귀국 교통편은 전무한 상황.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자 유엔에 지원하다

 
 ◇ 전쟁 중 통역관 시절 문익환


전쟁은 늦봄을 비껴가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고국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늦봄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유학 중이었다.
전쟁 소식을 접한 늦봄은 앉아서 공부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당장 귀국하려 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가는 모든 교통수단은 막혀 있었다. 고국의 소식을 알 수 없는 탓에 가족의 안위는 더욱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이에 늦봄은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한국에 가기 위해 유엔군에 지원했다. 그리고 도쿄에 있는 유엔 극동사령부의 연합군 통-번역부에 발령받게된다. 유엔 극동사령부는 인류의 전쟁과 위기를 관리하는 본부와 같은 곳으로 지구촌의 정세가 한눈에 읽히는 곳이었다. 연합군 통-번역부(Allied Translator and Interpreter Section)는 전선에서 노획해온 문서들을 분류하고 번역해서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는 곳인데, 한국인 직원은 약 30명 정도로 사령부의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열리자 늦봄은 판문점을 오가며 유엔군 군속으로 미국 측 통역을 맡았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선포까지 2년 동안 분단의 현장 판문점에서 활동하게 된다.  
정전협정은 미국, 북한 그리고 중국 측 대표 3자가 영어를 공용어로 진행하였다.
남한 측 대표는 발언권도 없이 진행되는 휴전협정에서 늦봄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약소국의 비애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분단의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한편 유엔 극동사령부는 미군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랭기지 스쿨을 운영하였는데 그 한글학교에서 문익환은 교장이 되고 함께 통역했던 정경모는 교무주임이 되었다.

3년간 동족 간의 전쟁으로 너무나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도 분단 상황은 그대로 지속되는 허망한 결과를 훗날 다음과 같은 두 구절로 표현했다.
 
치고받으며 서로 찔러 죽이던 원수들도
땅에 남긴 발자국들이야 그게 그것 아니던가


종전이 아닌 휴전의 세월이 지금까지 계속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분단을 극복하고 진정한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은 어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배보구 밥먹구 하며…
너는 말을 이쁘게 잘 하고 깜직한지 아빠가 돌아오시면 녹으실게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교
아빠께서는 전시에 평안히 공부하실 수 없다고 군인을 지원하시어 지금 동경 최고사령부에서 
일보고 계신다. 식구들을 데려가시려고 수속 중 이시나 언제될런지?”
 

 
 ◇박용길이 기록한 문영금 육아일기(1950) 중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미국 지역신문에 실린 문익환 참전에 관한 기사 스크랩. 박용길이 기록한 문영금 육아일기(1950) 중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기사 번역
Timothy Moon(티모시 문)이 도쿄에서 미국 통역가로 일하다


지역에서 잘 알려진 한국인 목회 학생인 티모시 문익환이 도쿄에서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두 나라인 한국과 미국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문 씨는 현재 일본 내 미군 기지 본부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10월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나 도쿄에 갔다.
1949년 9월과 12월에 Moxham 제2장로교회에서 설교했다. 그 교회의 전임 목사인 고든 스코빌과 함께 방문했다. 스코빌 목사와 티모시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1932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함께 공부했었다. 티모시는 제너스타운 근처 파인 스프링스 캠프 장로교회에서도 직원으로 일했었다.
티모시의 형제 동환(스티븐)은 지난 8월에 미국으로 유학을 올 예정이었으며 그 또한 장학생이다. 그런데 티모시는 9월 12일에서야 동환과 그의 누이 선희(그레이스)가 남쪽으로 피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월에는 신학교 졸업생인 티모시의 부인도 두 자녀를 데리고 부친 문 목사와 함께 시골로 피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티모시는 미국으로 보내는 한 편지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지독한 고난을 겪었지만 죽음은 면했다고 했다. 한국전쟁 중 대략 100여 명의 기독교계 지도자가 살해되었는데 그들 중 40명이 목사였다. 그중 한 명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총무였으며, 또 한 명은 티모시가 다녔던 신학교 교장이었다.
스코빌 목사는 최근 문 목사에게서 이러한 편지를 받았다: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에게서 평화로운 소식이 들리기를 고대하고 있는 걸 아네. 걱정하지 말게, 형제여. 우린 지금까진 괜찮다네.”
12월 9일 자 편지에 문 목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지만 여기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오. 지금은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네.”
1년보다 더 전 존스타운에서의 인터뷰에서 문 씨는 미국의 도움에 고마움을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일본군보다 더 잔인한 러시아군에 비하면 미군은 정말 신사다.”
문 씨는 내년에 프린스턴에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판문점 휴전협정에 참여한 통역관 문익환이 헬기에서 내리는 모습


<글: 오남경>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참고문헌]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월간 문익환_6월 <늦봄과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