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6월 <늦봄과 6.25>

🈷️ 제주로, 거제로, 정처 없는 피난살이

[늦봄 가족들의 피난 생활]

 
 

납북 위험 넘기며 살아남은 3개월

▲서울→경기도 광주, 다시 서울로

한국전쟁 발발부터 9.28수복까지 3개월간 박용길과 가족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생활했다. 늦봄은 1949년 10월에 미국 유학을 떠나고 서울에 없었다. 6월 26일 오전에야 인민군이 서울 가까이 다가온 급박한 상황을 인지했다. 우선 젊은 문동환과 문선희를 재빨리 서울에서 빠져나가게 했다. 남은 8명의 가족은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오가며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하루는 박용길이 친구네 집을 찾아갔다가 인민군에게 붙들렸다. 인민군이 용길을 차에 태워 집으로 와서는 김신묵에게 아들의 소재를 물었다. 문재린이 나서서 아들딸은 부산으로 내려갔다고 하자 인민군은 아들딸이 서북청년단 아니냐며 내무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내무서행은 곧 사지로 가는 것임을 아는 문재린은 ‘아들이 서북청년단이면 책임을 지겠다’며 ‘성북내무서장 문경춘과 잘 아는 사이’라는 말로 인민군의 의심에 기민하게 대처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아빠(늦봄)께서 오던 소식은 끊어지고 큰삼촌 큰고모는 남으로 내려가시고, 매일매일 공포와 어려움 가운데서 지내게 되었다. 모두들 식량 때문에 고생을 했으나 우리는 할머님(김신묵)께서 준비해 두셨던 쌀이 있었기 때문에 덜 고생을 하고 어려운 병자에게도 쌀을 보내줄 수 있었다.
(
박용길의 문호근 육아일기. 1950년 6월)

9.28 수복 직전에는 식량이 부족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김신묵이 경기도 오산을 지나 서해가 보이는 마을에 가서 쌀과 보리를 구해오기까지 4~5일을 고생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미군 비행기가 피난 행렬 속에 후퇴하는 인민군이 섞여 있다고 보고 행렬을 향해 기총사격을 가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을 본 김신묵 일행은 좁은 샛길로 빠져 짐은 머리에 이고 리어카를 겨우 끌며 이동해야 했다. 한강 가까이에서는 인민군이 우글우글한 부락을 지나치기도 했다고 김신묵은 회고했다. 

이에 앞선 8월 초 인민군 치하에서 가족들이 위험에 처하자, 김신묵과 문영금만을 서울집에 남기고 나머지 가족 6명은 경기도 광주로 피난했다. 거기서도 쌀을 구하기 어려워 9월 8일 문재린만 남기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박용길의 문호근 육아일기(광주 피신 시기에 보리죽과 밀밥을 먹었고 호근의 몸이 안 좋아졌다는 내용)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재린은 납북의 위험을 피했다. 인민군들은 후퇴 전 기독교연맹 이름으로 서울의 교역자들에게 소집장을 발송했고, 인민군 한 명이 문재린의 소집장을 들고 종일 집 앞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 문재린은 경기도 광주에 피신하고 있어서 소집을 피할 수 있었다. 그때 소집된 많은 교역자는 북으로 끌려갔고 김신묵의 친동생 김진국도 이때 실종되었다.

 

피난 길 인천에서 네 살 호근을 잃어버릴 뻔

▲인천에서 배편으로 제주도행  

피난 길에 호근을 잃어버릴 뻔한 일도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선교사들 주선으로 목사들과 가족들 580명이 제주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문재린은 이 일의 단장 역할을 맡았다. 인천항에 모여 배를 기다리는 중 김신묵이 엿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려는데 호근이가 보이지 않았다. 박용길이 미국의 늦봄에게 피난 소식을 알리는 편지를 부치러 의근을 업고 우편국에 간 사이 가족이 탄 차가 떠나버렸는데, 가족들은 호근이가 엄마를 따라간 줄로 알았고 박용길은 식구들이 호근이를 챙길 거로 생각하고 두고 갔던 것이었다. 그제야 문재린이 급히 차를 얻어타고 다시 출발지였던 인천 시내 예배당 앞에 가서야 호근을 만날 수 있었다.

혼잡한 틈을 뚫고 김신묵이 아이들을 배에 태웠는데, 피난민 전체를 통솔하던 문재린이 배가 떠날 때까지 오지 않았다. 배가 출발한 후 한참 간 다음에야 그가 작은 배를 타고 뒤쫓아 와서 큰 배에 올라탔다.

 

피난 중에도 군인 속옷 보내주기 운동 

▲제주에서 580명 공동체 생활

서울의 교역자와 가족 580여 명을 태운 배는 12월 29일 제주도에 도착했다. 박용길 가족은 제주 서부교회의 방 하나에 들었다. 땅이 꽁꽁 언 추운 겨울인데 밥은 마당에서 풍로에 숯불을 지펴서 해 먹어야 했다. 김신묵은 피난민들의 공동체 생활을 위해 목사부인회를 조직하여 전도를 하고 피난민 거처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데 힘썼다. 죽어가는 병사들을 돌보는 봉사를 펼쳤고 군인들에게 속옷을 보내주는 운동을 하였다. 

김신묵은 늦봄이 가족들에게 보낸 물건과 구호품을 시장에 내다 팔아 모은 돈을 군인들에게 보낼 속옷을 만드는 데도 보태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동환이 미국 유학을 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하여 감사헌금을 하는 셈 치고 돈 6만 원을 내놓았고, 이 돈으로 제주도에 있는 면을 다 사서 목사 부인들과 함께 군인들을 위한 면 팬티를 만들어 보냈다.

 
◇제주도 돌담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1951년. 문재린, 김신묵, 문영환, 문은희, 박용길과 아이들)


문재린은 제주도 있는 군인들을 심방하기도 하고 멀리 강원도에 있는 교회들을 돌아보곤 했다고 한다. 박용길의 1951년 6월 일기에도 그가 종군목사로서 일선으로 떠났다고 적고 있다.

 
◇박용길의 문호근 육아일기(1951년 제주도) 문재린 목사가 종군목사로 일선으로 떠났다는 내용과
타올에 붉은 십자가를 수놓아 보낸 일이 적혀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제주도 피난 시절 박용길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1951년 7월 7일). 영금의 세 돌에 기주떡을 해먹었고 부산에서 큰 석유등잔을 사와 편지를 쓴다고 적었다. 7명이 한 방에서 어떻게 잤는지도 그렸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제가 부산 갔다 와서 큰 석유등잔을 사왔기 때문에 환-한 불 밑에서 이 글을 씁니다. 발을 맞대고 자는데 지금 의근이는 누워자고 있습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밥을 먹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피난민들. 밖에서 밥을 하기 때문에. 그래도… 찬송가 소리가 들려옵니다. (1951년 7월 7일 제주도의 박용길이 도쿄의 늦봄에게 보낸 편지)
 

진료소 만들고 중학교도 설립

▲제주도에서 거제도로
 
◇박용길의 문영금 육아일기(1951년말 경 거제도). 거제로 이사 오니 문밖이 바다이고 부산이 가까워져서 아빠와도 가까워진 듯하다고 썼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목사 가족들의 제주 피난 일이 정리되자 문재린은 1951년 9월 거제도로 가서 피난민을 돌보게 되었다. 거제도 피난민들은 함경도 출신이 많았고 이들 대부분이 교인이어서 함경도를 선교구역으로 삼았던 캐나다 선교부가 관심이 있었는데, 문재린은 북간도에서 캐나다 유학을 지원받은 때부터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장승포에 거처를 마련하여 캐나다 선교사와 함께 일하면서 진료소를 만들었다. 이후 옥포교회를 맡아 시무하게 되었는데 목사의 지도권을 내세우지 않고 더불어 일하는 교회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노력하였다고 한다. 피난민이 밀려들어 옥포교회는 성황을 이루었고 피난민을 위한 중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을 맡고 독일어를 가르쳤다. 

다른 가족들도 1년간의 제주도 생활을 마치고 12월 29일 거제도로 이사했다. 옥포에는 김신묵과 문영환, 아이 영금이가, 장승포에는 박용길과 문은희가 살았다. 영환은 배를 타고 장승포 중학교에, 은희는 국민학교에 다녔다.

 
◇박용길의 문영금 육아일기(1951년 말경 거제도). 바닷가에 살게 되었고 아이들이 넓은 푸른 바다 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고 썼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캐나다와 미국에서 문재린 앞으로 구호품이 많이 와서 피난민과 원주민에게 나눠 주었다. 한번은 늦봄이 가족에게 물건을 보냈는데 문재린이 부산에서 받아서 다 팔아 처분하고 돌아왔다. 좋은 옷과 물건이 있었는데 헐값에 팔아 박용길이 섭섭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눈병이 돌았다. 박용길의 아이들 셋도 도라홈(트라코마)에 걸렸는데 호근은 안구가 손상될 정도로 증상이 심해 부산으로 나와 수술까지 하였다. 도쿄로 갈 준비를 위해 부산에서 만든 여권 사진에는 아이들 셋의 눈 상태가 모두 좋지 못했다고 한다.

 
◇늦봄이 거제도를 방문한 때의 가족사진(1952년)


 
◇거제도 옥포교회 성가대 및 주일학교 직원들(둘째 줄 중앙이 문재린)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박용길, 전도사로 도쿄행…늦봄과 합류

▲아이들과 함께 도쿄로

도쿄 유엔 극동사령부에서 일하던 늦봄은 1952년 3월 판문점 정전회담 통역으로 참석차 서울로 출장을 왔다. 박용길은 3월 말 서울로 가서 늦봄을 만나고 37일 만에 거제도로 돌아왔다. 늦봄이 애타게 뛰어다녀도 직계가족의 일본행이 지연되자 박용길이 직접 요코하마교회 전도사직을 획득하여 마침내 9월에 아이들과 도쿄로 건너가 늦봄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한국말 가르치는 미군 학교 교사들과 늦봄(도쿄)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가족들은 서울로…늦봄은 프린스턴으로

▲종전 후 다시 서울로

1953년 종전 후 9월에 거제도의 가족들은 서울로 돌아왔고, 1954년에 박용길과 아이들은 서울로, 늦봄은 8월에 프린스턴으로 돌아갔다. 전쟁 3년여 동안, 문재린과 김신묵, 박용길은 강인함과 침착함으로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고 위기의 순간에는 기지를 발휘하며 항상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믿음으로 피난민을 보살피면서 궁핍하고 혹독한 시간을 견디어냈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한국전쟁 시기, 늦봄 가족의 피난 과정

1949년 여름 늦봄은 미국으로 유학, 프린스턴 신학교 석사과정 시작
1950년 6월 25일 가족들은 돈암동 신암교회에서 주일예배. 오후에 한국전쟁 소식 들음.
문동환과 문선희는 서울을 떠나게 하고, 가족 8명은 박용길 친정인 서울 종로구 운니동으로 며칠 옮겼다가 돌아옴
1950년 8월 첫 주일예배 후 가족 6명 경기도 광주로 피신(시어머니 김신묵과 딸 영금은 서울에 남음) 쌀을 구하기 너무 힘들어 문재린만 남고 5명은 약 1달 만에 서울로 돌아옴
1950년 9.28 수복 직후 문재린도 광주에서 서울 집으로 복귀. 문동환과 문선희도 돌아옴
1950년 12월 21일 서울 탈출. 식구 9명은 23일 인천에서 일본 배 승선, 27일 부산 기항, 29일 제주도 도착
1951년 9월 문재린, 거제도에서 피난민 지원 시작, 다른 가족들은 11월 29일 거제도 장승포로 이사
1952년 가을 박용길은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늦봄과 함께 생활 시작
1953년 9월 문재린, 거제 옥포교회 사직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옴
1954 박용길, 아이들과 함께 귀국. 늦봄은 프린스턴으로 돌아가 석사 취득 후 55년 귀국



[참고문헌]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문영금 문영미 엮음 (2006).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서울: 삼인
박용길 육아일기 (문호근 육아일기, 문영금 육아일기)
정경아 엮음 (2020). 『봄길 박용길』. 서울: 삼인.

월간 문익환_6월 <늦봄과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