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4월 <청년 문익환>

🈷️ 새롭게 소개하는 청년 문익환의 기록들

명동촌-용정-평양-도쿄-금강산-신경-김천-서울-프린스턴….

서른여덟에야 비로소 유랑의 마침표

 
4월에는 민주화·통일운동가의 모습이 아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익환 목사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기록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순탄치 않았던 ‘청년’ 의 여정  

▲일제시기 태어나 넓디 넓은 공간을 누비며 살았던 한 개인의 삶
일반적으로 문익환 목사의 삶에서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이 있었던 해인 1976년을 기점으로 이전시기는 ‘개인사의 영역’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평범한 개인의 삶 전반이 이 영역 안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초·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스물 한 살 때 일본신학교에 유학한다. 도쿄 시절에 알게 된 전도사 박용길과 1944년에 결혼하고, 만주 신경(현재 창춘)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6년 월남하여 이듬 해 서른 살의 나이로 한신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949년에 다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유엔군에 지원해 통역자로서 정전회담에 참여한다. 그의 신분적 정체성이 최종 확정된 것은 1955년, 미국에서 돌아와 한신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한빛교회 목사가 되면서였다(김형수 2018, 28).

이 시기에 늦봄은 어릴 적 동무들과 함께 명동학교, 은진중학교, 평양숭실학교 등을 다니고 아내인 박용길을 도쿄의 신학교에서 처음 만나 연애와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해방을 맞은 후엔 남한으로 내려와 목사가 되고 신학자로 성장하고자 애썼으며 구약의 대가로서 성경번역 활동에 매진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서른 여덟 살이 되기까지(1955년) 그가 머물렀던 공간을 대략만 짚어도 그의 시간들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짐작이 됩니다.
 
 

‘청년’ 늦봄의 흔적은 근현대의 역사 

▲투사가 되기 전의 늦봄의 흔적들이 갖는 의미
늦봄 문익환과 관련된 기록은 2000년대 들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지원으로 두 세 차례 정리가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이라는 테두리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선별해서 진행하다 보니 개인사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로 여겨져 정리대상에서 제외되거나 가치가 덜한 사료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운동 시기에 생산한 기록과 비교해 오히려 더 오래되었고 역사성이 풍부한 중요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흐름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고 특히 이 기록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보여준다는 역사적 가치 뿐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진 늦봄 문익환이 움트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반인의 삶에 가까웠던 문익환의 기록들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기록들인지 알아야 그 관심이 자연스레 생기고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년 문익환을 보여줄 수 있는 기록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선 1976년 이전을 보여주는 기록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 주고받은 편지, 복음동지회 기록, 사진앨범과 구술한 기록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연애시절 편지는 주목할 만한 사료

▲주고받은 편지
이 시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편지 시리즈는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연애시절 용정과 서울로 떨어져 있던 문익환과 박용길이 주고받았던 1940년대 초반에 쓰인여진 연애편지와 그들의 결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주었던 지인들이 쓴 결혼 설득 편지, 1949년 여름,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문익환과 서울에 남아있던 박용길을 비롯한 가족이 함께 주고받았던 유학시절 편지가 있습니다. 또 유학 기간 중 발발했던 한국전쟁 와중에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1955년 전쟁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까지 주고받았던 편지가 포함됩니다.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고생해서 만났던 프린스턴에서의 첫 심경을 가족들에게 적어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바라고 바라던 Princeton에 와서 조용한 Hodge Hall 415호실에서 지금 붓을 달리고 있읍니다. Princeton의 분위는 상상하고 있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조용하고 신선하고 깨끗한 곳입니다. 설립된 지 138년 되는 미국의 최고의 학교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건물들도 좀 낡은 편입니다. 그러나 좀 낡은 건물 때문에 저에게는 더 아늑한 안정된 느낌을 줍니다(문익환 1949. 9. 27). 
 
◇1949년 9월 27일. 문익환이 아버지 문재린(아호는 문승아) 목사에게 보낸 편지로 프린스턴에 도착한 소감을 적고 있다. Timothy는 문익환의 영어이름이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국내 첫 신약번역 ‘마태의 복음서’ 도

▲복음동지회
복음동지회는 진보적인 개신교계 인사들이 1948년 창립한 초교파적 성격의 신앙운동단체(한국민족문화대백과)입니다. 전공과 교단이 달랐지만 문익환을 비롯해 장준하, 전택부, 종로서적의 장하구 등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는 여러 신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모임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문익환 목사가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참석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고 합니다(문동환 2009, 176). 
늦봄 아카이브에 남겨진 기록 중 눈에 띄는 것으로  ‘복음동지회 회보’ 가 있습니다. 복음동지회 모임에 참여하면서 만들어졌던 ‘임마뉴엘 신학강좌’ 등 활동이 어떻게 계획되고 운영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자료입니다. 또 복음동지회가 번역한 신약성경 번역의 결과물인 “새로 옮긴 신약성서 1. 마태의 복음서 (1961년 간행)” 가 남아있는데 이는 국내 신학자들에 의한 최초의 번역서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전에 늦봄 아카이브에서 콘텐츠로 소개하기도 했던 서른 두살 문익환을 위한 ‘도미 송별회’는 바로 이 복음동지회 회원들이 열어주었던 것이었습니다.
 
◇ 향린교회에서 복음동지회 회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문익환(왼쪽)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 복음동지회 회보. 1956년 1월. 서기 전택부라고 적혀 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 복음동지회가 번역한 “마태복음” 국내 신학자들에 의한 최초의 번역서.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밤 새워 작성한 설교원고 등 소장

▲설교 원고와 노트 시리즈
늦봄은 시와 수필, 설교와 강연 등 대중적인 말과 글로 유명하지만, 또한 전문잡지에 학문적인 글도 많이 발표했던 학자였습니다. 특히, 그의 글은 『신학연구』, 『기독교 사상』, 『십자군』, 『세계와 선교』, 『제3일』 등에 자주 발표되었는데 발표했던 글들의 목록은 문익환 평전의 연보 부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김형수 2018, 711-716). 늦봄이 설교 준비를 할 때면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박용길 1981, 8. 22)고 하는데 늦봄 아카이브에는 설교 원고나 초고 성격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다수 남겨져 있습니다. 
 
◇설교문을 정리를 위해 임시로 묶어 놓은 모습, 주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인 1955부터 3년 동안 작성된 것들이다. 
 

전쟁-유학 등 앨범에 주제별 분류

▲사진 기록들
늦봄문익환아카이브가 갖고 있는 사진들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박용길이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 주제별 앨범입니다. 여기에는 복음동지회, 전쟁 이후 일본시절, 프린스턴 유학 시절을 담은 앨범들이 있습니다. 또한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사진들도 있기 때문에 앨범이 포함하는 시간, 내용적 범위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 박용길이 소장했던 사진 앨범들

통일의 집에서 열렸던 전시에서 종종 등장했던 옛날 사진들은 바로 이 앨범을 출처로 하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정리작업을 할 때 이 앨범의 사진들을 디지털화 했지만 여러 이유로 아직 온라인 서비스는 되지 못하고 있고 대표적인 사진들을 온라인 아카이브로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이외의 것들은 개별적인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제공해드리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명동학교, 명신여자중학교, 숭실학교 사진, 윤동주 관련 사진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작년에 열렸던 “땅의 평화” 전시에서는 새로운 사진 기록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늦봄이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주제로 전시를 열었고 문영금 관장님을 통해 잊혀 있었던 늦봄이 직접 찍은 한국 전쟁의 모습을 담은 컬러 사진들이 최초로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6.25전쟁 70주년 기념 특별전 ‘땅의 평화’ 포스터(왼쪽)와 늦봄이 촬영한 슬라이드가 담겨 있었던 철제 상자(오른쪽).
정전회담 당시 판문점과 군인들의 모습을 컬러 사진으로 찍어 보관했다.
 
◇6.25 전쟁 중 유엔 통역병으로 근무하던 문익환의 젊은 시절.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전쟁 때 유엔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젊은 시절의 문익환의 경험은 이후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이후 계속될 ‘콘텐츠 플러스’ 작업에서 전쟁의 경험이 그의 삶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아주 중요하지만 아직 미 발굴된 부분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음성, 영상 기록들로 주로 문재린, 김신묵이 구술한 것을 음성이나 영상자료 형태로 남겨놓은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회고록을 집필했던 손녀 문영금은 이 기록들에 관해 ‘캐나다에서 귀국한 후, 문익환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 문재린, 김신묵, 문익환 세 분이 옛이야기 하듯 하나 하나 짚어 가며 녹음한 테이프 40여개 정도 있다. 문재린의 회고록을 인터뷰 형식으로 녹음한 테이프가 9개, 문재린 사후 김신묵이 손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테이프와 원고들도 있다(문영금 2006, 7-8)’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부만 디지털화…아직은 목록화 수준

▲ 노후화된 까다로운 정리대상
개인의 삶으로서 청년의 문익환을 확인하려면 갈 길이 멉니다. 더 풍부한 맥락에서 청년시절의 늦봄을 그려낼 수 있도록 앞으로 늦봄아카이브가 남겨진 기록을 잘 정리해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기록 중 복음동지회 기록과 노트류 일부가 작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의 일환으로 목록과 디지털화가 이루어졌을 뿐 대부분은 간략한 목록만 만들어진 상태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래된 옛날 편지들의 경우 늦봄 아카이브에서 자체적으로 임시 목록을 만들고 최소한의 보존 조치를 취해 놓은 상태이나 손으로 쓴 글씨인데다가 한자와 영어가 섞여 있어 읽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듭니다. 앞으로 사료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의미 있게 묶어서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진 앨범도 노후화가 심각하고 구술기록의 경우 녹취문이나 상세목록 등 해제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해 풀어야 할 숙제는 많지만 한편으로는 발굴될 만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것이기에 모두를 위한 아카이브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4월의 기록 이야기는 늦봄의 옥중편지를 읽으며 그의 청년시절을 그려보면서 맺으려고 합니다. 
 
“아무 배경도 기반도 없는 데서 생을 설계해 나간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안다. 계획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지 않는다고 너무 초조해하지 말아라. 주어진 오늘을 주어진 제약 속에서나마 충실히 살아가노라면 모든 일이 뜻하지 않은 보탬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 세대의 좌절을 너희 세대가 겪는다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나의 생을 생각해 봐라. 스무 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서른 여덟에 목사가 되었으니 나의 생이 얼마나 좌절과 중단의 연속이었는가? 그리고 그 후로 오늘까지의 나의 생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거든. 그 좌절들을 하느님은 몇 갑절씩 축복으로 보탬 해주셨거든. 조바심을 털어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면 의외로 모든 일은 슬슬 풀릴 거다(문익환, 1979. 5. 16)”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삼 년 묵은 아키비스트로 늦봄과 봄길의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1979. 5. 16)
문영금 문영미 엮음 (2006).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서울: 삼인
문동환 (2009), 『문동환 자서전』. 서울: 삼인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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