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4월 <청년 문익환>

🈷️ 소년기의 전학인생

5번의 전학과 자퇴…고단했던 ‘만년 전학생’   


늦봄의 학창시절은 파란만장했다. 6년제 소학교와 5년제 중학교 제도 아래에서 모두 5군데의 학교를 다녔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명동촌의 변천, 이념으로 갈라진 동족 간 갈등, 일제 강압 통치 정책 등으로부터 오는 혼란과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기에 늦봄의 학창 시절은 시련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5년 늦봄이 처음 입학한 명동소학교는 1920년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 후 명동촌 주민들의 모금으로 3년 만에 신축된 학교였다. 당연히 학업 여건은 매우 좋았다. 브라스밴드와 테니스코트, 전기실험 도구, 생물표본 등을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1925년에 중학부가 폐지되어 소학교만으로 축소된 상태였지만, 명동촌 출신 소수의 학생들만이 다니고 있어 오히려 내실있는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 강한 학업분위기 속에서 절친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보낸 늦봄의 학교생활도 대부분 활기차고 즐거웠다. 잘 알려진 대로 5학년 때에는 <새명동> 문집 발간을 시작했고 6학년 때에는 학생자치회를 만들고 신문사를 두어 늦봄이 초대 사장이 되었다.

 

‘최초의 분단’ 체험장으로

▲명동소학교(1925~1931)
 
◇늦봄이 유년시절을 보낸 간도 화룡현의 명동 소학교


소학교 입학 이후 몇 년간은 늦봄이 평생 ‘마음의 천국’으로 그리워한 추억의 시간이었다. 가족은 단란했고 집안 형편도 명동촌의 상황도 모두 평온했다. 홍범도와 김좌진의 독립군, 안중근이 명동촌 선바위에서 권총 연습을 하던 일 등 비밀스럽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보낸 시간이었다, 또 사계절마다 변화하는 아름다운 명동촌 산하를 보고 즐기며 성장한 꿈 같은 시간이었다.
고학년 시절은 다소 힘들고 고민스러운런 시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4학년이 되는 1928년은 러시아혁명 10년째, 명동촌에도 사회주의 열풍이 깊이 침투된 상태였고, 용정지역 공산당은 명동학교를 명동교회 로부터 분리시켜 인민학교로 만들려고 공작하고 있었다. 집안 간, 친구 간, 심지어 가족 간에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노선으로 갈리었다. 5학년 때 친구 송몽규가 공산주의자 편에 서서 어른들 앞에서 연설을 할 정도였다. 공산주의자의 폭력으로 매일 밤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고 명동촌 공동체는 해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늦봄이 이런 극심한 갈등을 모를 리 없었다. 1928년 캐나다로 유학 간 부친이 부재했던 이 시기는 ‘늦봄이 체험한 최초의 분단’이기도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1년 

▲해성소학교(1931~1932)

윤동주 가족이 먼저 명동을 떠나고 이어 늦봄 가족도 1931년 세밑에 용정으로 이주했다. 3월에 늦봄은 소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명동소학교 졸업은 중국으로부터 정식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학교 과정이어서 늦봄은 중국계인 해성소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다. 해성소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고 학생의 대부분은 일제와 지주의 이중착취에 시달리는 소작농들의 자녀들이어서 민족의식보다 계급의식이 강한 분위기였다. 늦봄에게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힘든 시간이었다

 

조선 역사 배우며 민족의식 꿈

▲은진중학(1932~1935)

1932년 해성소학교 졸업 후 늦봄은 은진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은진학교에는 명동촌의 지도자 김약연 선생이 교장으로, 캐나다에서 돌아온 부친 문재린도 교직에 있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영국 덕이라 부르는 영국조계지 내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었다. 조선어를 국어로 가르쳤고 국사 과목도 가르쳤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국제적 목회자로 존경받는 늦봄 부친은 용정중앙교회를 맡은지 2년 만에 예배당을 2층으로 신축하며 번창해갔고, 늦봄은 교회 소년부 회장이 되어 안정되고 즐거운 중학생활을 이어갔다. 명동소학교에서처럼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배우고 꿈을 키우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은진중학 3학년을 보내는 늦봄에게 새로운 선택이 필요했다. 당시는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해야 전문학교 또는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은진중학은 4년제 학교였다. 용정에서 5년제 중학은 친일학교인 광명중학 뿐이었다. 그리고 5년제 중학으로의 편입은 5학년이 아닌 4학년이 되기 전에만 허용이 되었기에 3학년을 끝내는 즉시 5년제 학교의 4학년으로 편입해야 했다. 미래를 위한 선택 앞에서 늦봄은 평양 숭실학교를 택했고, 1935년 18세에 4학년으로 편입했다. 윤동주는 편입 시험에 탈락하여 늦봄보다 6개월 늦은 가을에야 편입하게 된다.
 
 

신사참배 맞서 동맹퇴학

▲숭실학교(1935~1936) 
 
박용길 장로가 옥중의 늦봄에게 보낸 편지에 붙어 있는 숭실학교 시절 윤동주와 ‘모자를 바꾸고 찍은' 사진

평양은 교통과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조선 북쪽의 중심이었다. 기독교가 일찍부터 전파된 도시였고 부친도 평양에서 신학을 배웠기에 늦봄에게는 정서적으로 낯설지 않은 도시였다. 근대적 도시를 체험하게 된 늦봄은 문예부장이었던 이영헌 선배와 윤동주와 함께 지내며 숭실학교에 잘 적응했다. 모던보이처럼 세련된 태도와 미남형의 얼굴을 가진 늦봄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호감을 얻어 갔다.  
잘 적응했던 숭실학교 생활은 불과 1년 만에 끝나게 된다. 4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전 학생이 동맹퇴학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1935년 11월부터 평양의 기독교 학교들에게까지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되었는데, 숭실학교 교장은 끝내 참배를 거부하여 학교 교장직 인가 취소 처분을 받고 말았다. 파면된 조지 맥퀸 교장은 1936년 3월 본국으로 돌아가고 새 교장이 취임했지만 4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이 문제가 크게 이슈화되었고 전 중학생이 동맹퇴학이란 최후의 방법으로 일제 통치에 항거했다. 늦봄은 유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평양을 떠나 고향 용정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솥에서 나와 숯불에 내려앉은 격” 

▲광명중학(1936~1937) 
 
◇늦봄의 광명학교 졸업사진(맨 오른쪽)

용정으로 돌아온 늦봄 앞에 놓인 것은 고난 그 자체였다. 5학년 편입을 위해 친일 계열의 광명중학교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기독교 계열 은진학교, 민족주의 계열 대성학교, 사회주의 계열 동흥학교는 모두 4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민족교육을 받아온 늦봄에게 광명학교 입학이란 환멸 그 자체였지만 졸업 후 진로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길이었다. 광명학교는 졸업 후 일본군 사관학교로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등 황국신민화교육에 매진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피해 돌아와서 황국신민화교육을 받게 된 상황, “솥에서 튀어나와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었다”. 감옥 같은 광명학교 1년을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당시 용정 동산교회에 근무하고 있던 이권찬 목사와의 교류였다. 이목사는 폐병으로 죽은 삼촌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삼촌의 절친이었다. 
감옥 같았던 학교는 마쳤으나 늦봄의 진로는 불확실했다. 졸업 후 교회와 집에서 일상적 생활로 잠시 시간을 보낸 늦봄은 조양천 소학교 교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교사가 되고 싶기도 했기에 공부와 교직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주변이 온통 일본의 지배 하에 놓인 상황에서 교육활동의 의미나 교사로서의 자긍심이란 찾을 수 없고 실망감과 허무함만 더해 갈 뿐이었다. 
 
◇ 용정 중앙교회 찬양대원 기념사진
 

신학교 선택 ‘목회자의 길’로

▲도쿄 일본신학교(1938~1943) 

이에 부친이 지린사범학교 진학을 권했다. 더 많은 공부를 원하는 늦봄을 생각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고민을 거듭한 끝에 늦봄이 내린 결론은 사범학교 진학이 아니라 목회자의 길이었다. 부친 문재린이 걸어온 길, 간도 대통령 김약연 선생이 걸어간 길이었다. 명동학교를 기독교학교로 만든 정재면 선생과 늦봄이 따랐던 선생님들이 모두 교사이기 이전에 목회자였다. 목회는 민족독립의 한 방편이기도 했고 목사는 애국자였다.
늦봄은 평양신학교에서의 공부를 염두에 두었으나 이권찬 목사는 일본 유학을 권했다. 국내 신학교는 일제의 압박으로 보수화 되어버렸고 좀 더 자유롭게 더 넓게 배우려면 조선보다는 일본 유학이 더 낫기 때문이었다. 일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본으로 유학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비애이기도 했다. 늦봄은 1938년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하며 신학 공부의 길, 즉 자기의 길을 찾아 들어선 것이었다. 


  <글: 조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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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문익환, 『문익환 전집』, 사계절, 1999
김형수, 『문익환 평전』, 다산책방,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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