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에게 ‘소년’ 윤동주를 물었더니…
저는 이곳 거창읍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입니다. 새로 생긴 조그만 출판사에서 국민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윤동주 선생님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책 42쪽에 문목사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목사님 주소를 알아내어 이렇게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다음을 살펴주셨으면 하고 감히 부탁 말씀 올립니다.
◇아동 문학가이자 초등학교 교사인 임길택 선생님이 늦봄에게 보낸 편지(왼쪽)와
이후 출간된 『한국위인전집 22: 윤동주』(두손미디어)(오른쪽)
감옥에 있는 문익환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어린이를 위한 시인 윤동주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기존에 발간된 윤동주 시인에 관한 책 내용에 대해 정정이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의 놀이 및 관심사, 성격, 일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였다.
윤동주는 문익환 목사의 출생지인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 6년간의 학창 시절을 함께 수학했던 동무였다. 늦봄에게는 송명규와 함께 하늘의 별이 된 명동의 친구들인 것이다.
늦봄은 옥중에서 답신을 써서 윤동주에 관해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갈등이 첨예했던 시기에 명동을 떠나 용정으로 이주하게된 경위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간도에서 같이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함께했던 윤동주와의 우정은 어땠을까?
신문사 사장 늦봄, 윤동주를 필진으로
▲소학교 때 만든 신문사
◇ 명동학교 제17회 졸업기념 사진. (첫째줄 왼쪽 첫번째 문익환 목사, 둘째 줄 오른쪽 첫번째 윤동주)
1909년에 간도에 신식 교육기관인 명동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으로는 김약연, 교감은 정재면 이었으며, 문익환의 조부 문치정이 재정을 담당하였다. 1911년에는 여학생부를 설치하여 북간도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여성 교육을 시작하였다. 명동학교에서는 북간도지역 한인들의 보호와 권익증진 의식개혁과 계몽, 독립정신 함양 기독교운동 활성화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활동하며 민족의식과 독립정신 함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독립 투사들에게는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 전 사격을 연습하며 거사를 준비하기위해 머물렀던 곳도 북간도 명동촌이었다. 특히 1919년 3월 조선에서의 만세 운동에 이어 간도에서도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승리에는 명동학교 출신들의 활약이 컸다. 1919년 3.13 만세운동, 1920년 15만원 탈취 사건 이후로 일본은 끈질기게 학교 운영을 방해하였다.
결국 1920년 10월 서양식 벽돌 건물로 증축된 명동학교가 일본군에 의해 불타고 김약연의 3년간 투옥 그리고 갑자년 대흉년으로 인한 학교 재정난까지 겹쳐 안타깝게도 1925년 폐교되었다. 이후 교육의 중심은 용정으로 옮겨가고 명동을 찾던 외지 유학생들은 용정으로 가게 되었다.
중학교는 운영이 불가하여 소학교만 겨우 명동마을 출신의 학생들만으로 유지되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좋았는지 모른다. 문익환의 일생에서 명동학교 시절처럼 풍요로운 때는 없었다. 자연환경도 가정형편도 시국상황도 평온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새 출발을 설계하고 할머니가 이끄는 가족문화는 단란했으며, 어린 창조자의 자기도취를 강화하는 어머니의 능력과 그 독창성에 대한 확신은 굳건했다.
― 김형수, 『문익환 평전』, 다산책방, 2018
늦봄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함께 베이징 유학을 떠났을 정도로 두 집안은 가까웠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태어났고, 6개월 뒤인 1918년 6월 문익환이 태어났다.
어릴 때 부터 절친이었던 둘은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 시절 5학년 때는 <새명동> 문집을 발간했고, 6학년때는 학생회를 자치제로 개편하고 신문사를 두기도 했다. 늦봄이 초대 사장이 되었는데 당시 신문의 주요 필자들은 윤동주, 송몽규, 김정우였으니 실로 대단한 집필진 이었다.
우리말로 공부하는 기쁨
▲행복했던 용정 시절
명동소학교 졸업 후 용정으로 이주한 늦봄은 해성소학교로 편입하여 졸업을 하였다, 조선인들의 교육기관은 졸업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소학교를 두 번 졸업하게 되었다.
용정에서 입학한 은진중학교는 영국 조계지 안에 있어서 일본 헌병이나 경찰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명동 교회로 돌아와 인재양성을 위해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고취하는 일을 하고 있던 김약연 목사가 교장이 되었고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도 교직에 있어서 조선어를 국어로 일본어를 일어로, 국사도 일본어로 되어 있는 교과서를 들고 우리말로 동시 번역해서 수업을 진행했다.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 세 친구는 다시 모여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동주의 핀잔 “이게 어디 시야”
▲평양 숭실학교 편입생 늦봄과 동주
동주는 숭실학교에 한 학기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동안 학교 문예지 편집을 맡았었고 거기 동주의 시 한 편이 실렸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갓 편입해온 학생에게 그 일이 돌아간 것은 ‘은진중학교’에서 먼저 숭실에 나가 있던 이영헌이가 문예부장이 되면서 동주에게 그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때 동주는 내게도 시를 한 편 써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 편 써 내었더니 “이게 어디 시야” 하면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시는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동주가 살아 있어서 내가 하는 성서번역을 도와주었다면(살아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나는 영영 시를 써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 문익환, 「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 『월간중앙』, 1976.
늦봄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5년제 중학교인 평양 숭실중학교를 4학년으로 편입한다. 뒤이어 6개월 뒤에 윤동주도 숭실학교에 편입했다.
평양 숭실학교는 서양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으며 기독교 교육의 온상이었다.
윤동주가 늦봄이 쓰고 있던 학교 모자를 탐내어 서로 바꾸는 대신 늦봄에게 호떡을 사 준 일이며, 교지 편집장이 된 윤동주가 늦봄에게 의뢰한 시를 받아 읽어보고 “이게 어디 시야”라며 한마디로 퇴짜를 놓은 사실 등이 숭실학교에서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윤동주와 함께 수학했으나 평양에서의 학생 생활도 겨우 한학기만 지내고는 1936년 4월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를 하게 된다.
◇ 모자를 바꾸고 찍은 사진. 숭실학교 학생들의 모자는 머리둘레를 재어서 자신에게 맞게 재단하여 만들었다. 늦봄의 모자는 반듯했으나 윤동주의 모자는 꾸깃하고 우그러져 펴지지 않았다. 윤동주는 늦봄의 모자를 탐냈고 늦봄은 ‘그렇게 탐이 나면 바꿔주겠다, 대신 호떡이나 사라’ 말했다. 그리하여 호떡집에 가서 실컷 호떡을 먹은 후 모자를 바꿔 썼다.(뒷줄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맨 앞 이영헌)
편입한 광명학교…치욕의 시간들
▲ 다시 용정에서
다시 돌아온 용정에는 5년제 정규 학교가 광명뿐이었다.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문익환은 5학년으로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다. 광명학교는 조선인의 황국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였으나 문부성 인가의 정규 중학교 자격이 필요하였기에 하는 수 없이 모멸의 생활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 후 다니게 된 학교였으니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늦봄은 자서전에서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솥에서 나와 숯불에 내려 앉은 격이었다”
1937년 광명학교를 졸업하고 적진을 빠져 나오듯 학교를 떠났다.
도쿄에서 동주와 마지막 만남
▲도쿄에서의 만남과 헤어짐
늦봄은 1938년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하며 신학공부에 나섰다. 자신을 이끌어준 정재면, 김약연, 한준영 등의 스승이 모두 목사였으며 애국자들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늦봄이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 어색하지 않다. 아버지와 삼촌 또한 목사였다. 일본신학교 역시 징집 거부로 자퇴를 하게 된다.
동주는 1942년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늦봄은 유학 온 동주의 ‘육첩방’에 찾아가 반갑게 만났는데, 동주가 교토로 옮기기 전 그의 하숙집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3월 6일 윤동주의 집 앞 뜰에서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가 영결식을 집례했다. 그리고 연이어 같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송몽규의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도 고리타분한 성서학자로 살지 않고 시인의 감수성으로 시를 쓰고 시인으로 살도록 자극을 주고 채찍질하는 것은 윤동주의 영향’이라면 구약성서 학자에서 시대의 투사가 된 계기는 시대의 어둠을 넋놓고 지켜볼 수 없는 몽규의 의지의 실행이었으리라.
◇1945년 3월 6일 용정 윤동주의 집에서 문재린(문익환 부친) 이 집례한 윤동주의 장례식.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 『정진구 인물 이야기 윤동주』는 2년 후인 1994년 정정 후 재발행 되었으며, 임길택 선생님은 두손미디어 한국위인전집 시리즈 22권인 <윤동주>를 출판하였다.
※참고 문헌
김형수, 『문익환 평전』, 다산책방, 2018
윤은성, 『세상을 바꾼 한국사 역사인물 10인의 만남』, 미디어샘, 2018
<글: 오남경>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동주야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 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카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후략)
― 『문익환 전집 2권: 시2』 <동주야> 중
임길택 선생님,
정진구씨는 내가 쓴 『아버지 어머니의 간도 이야기』(形成社: 죽음을 살자, 고은 엮음, 에 실려 있음)를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좀 더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명동을 간도 민족 운동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만들게 된 경위가 거기에 꽤 소상히 밝혀져 있는데 말입니다.
윤씨 가문이나 동주의 외가인 김약연 목사님 댁이나 우리 집이 명동을 떠나 용정으로 이주한 것이 중국 마적단을 피해서 간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명동은 동만의 대통령이라고 불린 김약연 목사님의 도읍지였지요. 그는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인 국민회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지요. 그런데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들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세력이 김약연 목사 타도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명동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사회주의 세력이었죠. 명동에는 비기독교인 지식층이 꽤 두텁게 자라나고 있었죠. 그들은 자연스레 김 목사님과는 거리를 두고 지내다 보니, 명동에서는 변두리로 밀려난 소외 계층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주의는 그들 속으로 번져갔는데, 김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가 6학년 졸업반 때 드디어 폭발하였습니다. 김 목사님은 학교를 그들 손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윤씨 가문에서도 동주의 할아버지 한 분을 빼고는 모두 그 반란 세력에 가담했습니다. 몽규의 아버지, 송창희 선생도. 때마침 우리 모두 용정에 가서 중학생 모자를 써야 할 때가 되기도 했구요.
저에게 졸업 사진이 있는데, 김약연 목사님을 모시지 않고 졸업 사진을 찍은 첫 학년이 바로 우리 있거든요. 이런 이야기는 저의 『간도 이야기』에는 없습니다.
― 임길택 선생님의 편지에 답신을 보낸 문익환 목사의 옥중편지 중(1992. 7. 21)
월간 문익환_4월 <청년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