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4월 <청년 문익환>

🈷️ 친구로, 라이벌로, 동지로…형제는 용감했다

[문동환목사의 ‘우리형’ 문익환]
 

◇미국 유학시절 프린스턴 대학에서 사진을 찍은 두 형제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형 문익환 목사와 아우 문동환 목사는 세 살 터울이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 일본과 미국에서의 유학, 교수 재직,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일까지 두 형제는 참 비슷한 길을 걸은 듯 보인다. 둘의 우애는 어렸을 적부터 주위가 다 알 정도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민족을 위해 일하는 동지이자 마음껏 신학적 토론이 가능한 둘도 없는 맞수로서 서로를 아끼고 의지했다. 그런데 문동환 목사의 회고록을 보면 동생은 항상 생김새나 성품, 학업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던 형과 비교당했고 형에게 집안의 지원이 먼저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항상 칭찬받고, 앞서갔던 우리 형…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면 언제나 우리 형을 보고는 “야 그놈, 잘생겼네. 이 백 량이 싸다” 하고 칭찬을 했다. 그리다가 나를 보곤 “그놈 눈도 크네. 퉁사발 눈이네”하고 웃었다. 그 말은 내 어린 마음에 가시처럼 박혔다.

나보다 세 살 더 많은 형은 나보다 훨씬 기슴[김]을 잘 맨다. 내가 열 자쯤 나갔을 때는 형은 스무 자는 나간다. 그리고 왜 그런지 내 고랑에 풀이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그것을 불평하면 형은 “그럼 고랑을 바꾸자”하고 나와 고랑을 바꾼다. …  이렇게 하는 것을 물동이를 이고 오시던 어머니가 보셨다.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면 또 형 칭찬을 하신다. 그리고 나는 불평 투정인 아이가 된다. 그 말을 듣는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중학을 졸업한 나는 어려서 결정한 대로 신학교로 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형이 벌서 동경에 있는 일본 신학교에 가 있었기에 나는 신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월급으로 우리 둘을 다 대학에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문동환 회고록(『문동환 자서전』의 원고)」 중에서

 

  ◇ 문동환(가운데)의 일본 유학시절, 안병무(오른쪽)와 함께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일본에 한발 늦게 따라온 아우 동환과의 유학 생활도 잠시, 1943년 학병 징발이 닥치려하자 두 형제는 만주 봉천으로 전학을 결심한다. 이 일에 대해 문익환 목사는 장준하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학병을 거부하고 동경에서 만주로 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장준하나 김준엽 씨는 그게 아니었어요. 그들은 피할 길이 없는 그 궁지에서 학병을 일본군을 탈영해서 광복군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로 삼기로 애당초 마음을 단단히 도사려 먹고 적극적으로 징병에 응모했더군요. … 그들에 비하면 학병을 거부하고 만주로 가버린 나의 행동은 소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 옥중편지 중(1991.8.1)

 

◇1943년 만주 용정에서 학병가는 청년들 기념촬영.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문익환, 문동환)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형의 그늘 벗어나려 도전 또 도전 

 

봉천신학교에서는 한 학기만 수학하고 더 깊숙한 산골인 만보산으로 들어가 형은 전도사 일을 동생은 교사 일을 맡았다. 그러는 동안 형 문익환은 박용길과 백년가약을 맺고 신경으로 나와 전도사 일을 하는데 거기서 그의 나이 28세때 해방을 맞았다. 
그 후 형제는 나란히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형이 먼저 장학금을 받아 1949년, 32세의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비슷한 길을 걸으며 비교될 수 밖에 없는 그 긴장 상태를 두 형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두 사람 사이에는 타인들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오직 사랑 속에 감추어진 한없이 고요한 경쟁과 갈등이 있었다. 형은 언제나 동생을 심도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지만, 동생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하게 형의 그늘에 가려져버리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의 영토를 개척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김형수, 『문익환 평전 (2004, 2018)』


 

늦봄 “순진한 동생…우린 난형난제” 


훗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처음으로 수감됐던 때를 떠올리며 문익환 목사는 거짓 진술을 하지 못하는 순진함을 두고 그 형제지간을 난형난제라 표현했다. 
 

나는 성서 번역 관계로 빠지게 되어 있었는데, … 어떻게 들통이 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 빤히 아는 사실을 숨기지 못하기로는 동환이와 나는 그야말로 난형난제라는 게 드러나지요. 동환의 입에서 모든 것이 술술 풀려나왔으니.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정서한 것까지 이야기할까? 나와 너무 같아. 나도 이야기하다 보면 꼭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술술 다 털어놓아 버리거든요. 조사를 받다 보면, 조사관이 나의 말동무가 되어 버린다구요.
― 옥중편지 중(1992. 2. 28)

 

◇통일의 집에서 토론하고 있는 문익환(왼쪽), 문동환(왼쪽에서 두번째) 형제.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또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신경은 실같이 가늘지만, 아우의 신경은 동아줄처럼 굵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문동환 목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동환이는 신경이 동아줄 같아서 괜찮지만, 명주실같이 섬세한 신경을 가진 사람으로 나는 이런 투쟁은 못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고문받은 것도 아닌데, 꼭 심한 고문이라도 받은 듯이 온몸이 쑤시고 아픈데 잠을 잘 수 있어야지요. 
― 옥중편지 중(1992. 3. 6)


보통 때는 운동을 제법 했는데도 실제 경기에 나가서는 언제나 내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그래서 친구들은 “넌 마음이 약해서 문제야. 좀 마음을 단단히 먹어!”하고 충고를 했다. 내가 생각을 해 보아도 나는 ‘기’가 약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다리가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 「문동환 회고록(『문동환 자서전』의 원고)」 중에서


 

형도 동생도 재판대 앞 강심장 

 
두 형제가  모두 상대방은 대범하고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명동촌에서는 서로 둘도 없는 친구로, 청년 시절에는 학문의 라이벌로, 그 후에는 민족을 위해 일하는 동지로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어느덧 서로가 맘놓고 의지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둘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든지간에  제3자가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재판대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강심장을 지닌 이들로 보였음이 틀림없다. 
 

(감옥에서 한 교도관이)
두 형제가 법정에서 당당히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서 감탄을 했다고 하면서 어떻게 두 형제가 꼭 같이 목사가 되고 뜻이 맞아서 민주화 운동에 같이 뛰게 되었느냐를 물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우리가 나서 자란 북간도 명동 촌의 역사를 설명했다. … 거기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민족을 위해서 바쳐지지 않은 삶이란 헛된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 「문동환 회고록(『문동환 자서전』의 원고)」 중에서

 

◇1988년 조국통일을 위한 범국민 대토론회에 토론자로 앉아있는 문익환(맨오른쪽)과 문동환(왼쪽에서 두번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익환, 문동환 두 청년은 온몸으로 역사를 받아내며 많이도 좌절하고 상처 입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이 듦과 상관없이 끝까지 청년의 마음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윤동주, 송몽규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삶을 대신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월간 문익환_4월 <청년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