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3월 <시인 문익환>

🈷️ 쉰 고개를 넘은 나이에 시를 쓰게 된 사연은?

“50중턱에 이르러서야 시를 쓰니 ‘늦봄’이 잘 어울리는 것 같군요”



문익환은 시인이다. 
주로 목사와 신학자, 그리고 무엇보다 통일운동의 상징성을 가진 사회운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1973)을 시작으로 모두 다섯권의 시집을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늦봄'이란 호답게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쉰이 넘어서였다.   
목사로 신학자로 그리고 민주통일민중운동 연합의장 등 활동가로 뜨거운 삶을 살면서도 그는 손에서 시를 놓치 않았다. 

늦봄은 왜 50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시를 공부하게 되었을까? 
그는 복음동지회 시절부터 성경 번역을 시작하여 1968년 4월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번역 위원장” 을 맡아 시가 거의  40%를 차지하는 구약성서를 번역했는데 이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히브리적인 감성에 압도되어 동화되지 않고 한국인의 감성에 부딪쳐 울림을 주고자 최대한 한국적 문학 가락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를 공부하고 직접 쓰게 되었다.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 후기에 그가 뒤늦게 시에 입문한 이유가 잘 설명돼 있다. 
 
문학작품 중의 문학작품이라는 구약성서를 어떻게 훌륭한 작품으로 옮겨 내느냐는 생각이 처음부터 나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소. '특히 그 시들을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는 한국 시단을 총동원할 심산이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더군요. 그러고 보니 나는 궁지에 몰리게 된 셈이었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시 공부를 시작할 밖에 없었던 것이오.
 

 늦봄은 옥중편지에서 자신이 항상 ‘지각생’이라며 50중턱에 시를 쓰게 되서 늦봄이란 호를 붙인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난 역시 만각(晩覺) 선생이랄까? 지각생이랄까?
난 인권운동·민주화운동·민중운동에도 지각생이거든요. 남들은 20대에 이미 뚜렷한 자각을 가지고 젊은 정열을 가지고 뛰어드는데, 60을 바라보는 나이에야 뛰어들었으니. 50대 중턱에 이르러서야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붙인 ‘늦봄’이라는 아호가 매사에 잘 어울리는 것 같군요. 일생 늦봄으로 살아가야죠. 일생 원숙기에는 이르지 못하고 만사를 시작하다 마는 걸까요? 내가 하는 일이란 씨를 뿌리고 햇순을 가꾸는 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요? 결실을 거두는 건 후세가 해줄 걸 기대해야 하는 걸까요?
※문익환 옥중편지 6차 감옥, 135신 중에서(1992.02.19)
 
  ‘죽은 순교자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마저 느꼈다’고 까지 할 정도로 50대의 늦봄은 시인들의 뒷모습도 부러웠다고 고백했다..
 
나는 50대 중턱에 올라서려는 나이에 시인들의 뒷모습을 멀리서 쳐다보면서 몹시 부러워했다. 그리고 젊은 시인들이 인생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고 생활고 끝에 쓰러지는 것을 보면 순수를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두 하늘 한 하늘』(1989), 『옥중일기』(1991)등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사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생전의 시집 5권과 신문 잡지에 발표한 시 가운데 70편을 뽑아 기념 시집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2018)도 출간 되었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 있는 시편 성서 초고 번역본, 중간 수정본, 완성본 등을 찾아보면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성서 번역의 노력과 고민을 느낄 수 있다.

 
텍스트, 화이트보드이(가) 표시된 사진자동 생성된 설명
◇시편 성서번역 초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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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가 시편 2편부터 41편까지와 109편에서 115편을 타이핑한 교정본.
 
◇성서번역 재연 책상.
 
◇번역위원 3인의 모습.


<글: 오남경>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월간 문익환_3월 <시인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