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꼬대 아닌 잠꼬대' 는 통일 정서 일으켜
당신께 아버님 빈소에 가설했던 전화 비용일 텐데, 왜 돌려주죠? 요새 내게 나타나시는 아버님은 아주 건장하시고 씩씩하셔서 내게 부쩍 힘을 붙여주시는군요. 고맙지 뭐예요. 난은 물을 많이 주면 꽃이 안 되어요. 김병희 목사 부인이나 유운필 목사에게 난 기르는 강의를 한 번 듣구려. 그보다는 난 기르는 책을 사서 공부하시오. 난뿐 아니라 화초 기르는 책이 많이 있는데,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기왕 손을 댄 거니까 제대로 잘해야지요. 생명 사랑이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되지요. 지식으로 안이 받쳐진 사랑이라야 사랑 구실을 제대로 하니까요. 오늘은 이만. 당신의 사랑 늦봄. 김명식 동지께 지금은 차별성이 아니라 동질성을 찾아야 할 때라는 이야기까지 썼던가요? 며칠 건너 뛰어야 했습니다. 난 경락 공부를 하면서 한국 사람뿐 아니라 일본 사람, 중국 사람, 필리핀 사람도 치료해 보고, 아프리카 사람, 미국 사람, 독일 사람도 치료해 봤는데, 경락의 운행이 다 한치 어긋나지 않고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살갗이 희다, 검다, 누렇다는 차이, 먹고 마시는 식생활의 차이 등은 극히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죠. 같은 사람이라는 동질성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한겨레라는 같은 사람이 지닌 동질성을 찾는 것도 우리가 이룩해내야 할 대종합의 기초가 아니면 출발점에 지나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동질성을 찾아 회복하는 일이 이념적, 제도적 종합보다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죠. 기본이, 출발점이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것은 지성의 영역이 아니라 정서의 영역이지요. 예술의 영역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한 겨레다, 같은 사람이다, 라는 정서적인 일치가 이루어지면, 이면적인, 제도적인 종합은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뜻과 열의가 생기죠. 지성의 눈으로는 전혀 안 될 것 같이 보이는 것도 기어코 해내게 되죠. 절벽을 뚫고라도 길을 내죠. 그 대신 그게 안 돼 있으면, 분명히 될 수 있는 일도 이 구실, 저 구실 안 될 구실만 찾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일으키고, 북돋우고, 확산시키는 일 없이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종합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죠. 따라서 통일 정서를 일으키는 일이 통일 예술, 통일 문학의 첫째 되는 관심사여야 하죠. 그렇다고 해서 예술, 문학만이 통일 정서를 일으키는 일을 하는가? 그건 아니지요. 현정화와 이분희가 탁구의 세계 정상을 정복한 것이 통일 정서를 확산시키는 데 얼마나 큰 몫을 했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해낸 것에 못지않은 일을 해낸 것 아닙니까? 적십자사가 주선한 남북 이산가족 만나기도 꽤 큰 몫을 했고, 앞으로도 할 거로 생각합니다. 통일 정서를 일으키고 확산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예술이나 문학이 해야 할 몫에 비길만한 일을 해낼 분야가 어디 또 있겠어요? 그런데 과학적인 세계관, 과학적인 역사관을 가진 예술인, 문학인은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 것 아닙니까? 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통일 정서를 일으키는 데 자그마한 공헌이라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가 “부르조아적인 소박한 민족 감정”으로 극히 소극적인 평가를 받았거든요. 늦봄 1992.09.30
문익환
1992.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