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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년

    -김선명 할아버지께 바치는 시 얼마나 긴 세월이었습니까 김선명 총각 할아버지 43년이나 당신을 가두어 둔 조국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입니까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누웠다 앉았다 일어서서 거닐다 또 누웠다 또 앉았다 또 일어서서 거닐다 0.75평 방을 왔다갔다하는 외로움 43년은 얼마나 긴 기다림이었습니까 예순아홉 살이시라지요 한 번도 여자를 안아 본 일 없는 그러니 기다리는 아내도 아들딸도 있을 리 없는 김선명 총각 할아버지 끝도 안 보이는 당신의 그 기다림은 무엇이었습니까 43년은 얼마나 긴 싸움이었습니까 몽둥이 찜질이야 기절해 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온몸 바늘로 찔러 대는 쓰림과 싸우며 버텨 낸 신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별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지금은 동굴 속 절망인가요 당신의 신념은 그 끝없는 동굴 폭발되기라도 바라 고집스레 뛰는 당신의 맥박인가요 그렇군요 당신의 기다림 당신의 싸움 당신의 신념은 그 깜깜한 절망 속에서도 멎기를 거부하는 당신의 염통이군요 철창 너머 조국의 푸른 하늘 쳐다보는 당신의 눈 백내장으로 흐려 와도 멈추지 않고 뛰는 당신의 염통 우리의 울분이군요 겨레의 힘이군요 백두와 한라를 잇는 역사의 험산준령 쿵쿵 울리는 해방의 예감이군요 억울하게 억울하게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가슴 울먹이게 하는 겨레의 꿈이군요 민족자주의 힘찬 기운으로 나부끼는 승리의 깃발이군요 이 겨레의 감옥 그 높은 담장 허물고 김선명 총각 할아버지여 활개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오십시오 모든 절망 마지막 한 오라기까지 살라 먹고 솟아오르는 태양 그 황금빛 웃음 웃으며 이 땅의 아리따운 봄 향내 당신의 애기를 낳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1993. 12. 12.

  • 방제명

    백두산 기슭에서 산삼 천 뿌리나 먹고 자란 신의주 사나이가 있다. 이름은 방제명 국군 HID의 대장으로 38선 북쪽에 백여 차례나 갔다 왔단다 “대장님……” 서둘러 배를 타고 쫓겨오면서 뒤에 남기고 온 찢어지는 소리 들려 와 한 달씩 위 스키만으로 살아가도 끄떡없던 몸이란다 강원도 어느 절간의 어느 스님의 염불 소리로 가슴의 불을 끄다가 가슴의 불이나 끈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 들어 천주교로 개종했단다 “좋아 그 결심 좋았어” 선선히 풀어놓아 주던 스님의 마음이 요새도 하늘처럼 높아 보인단다 “내가 언제 교회를 믿었나 하느님을 믿었지” 이 말을 남기며 평양 사제관을 나섰다는 안중근이 좋아 아침마다 남산 안중근 동상 앞에 가서 성호를 그으며 죽을 날을 기다린단다 그 방제명이 안동교도소 접견실에 나타났다 손이 닿지 않는 저편에서 번득이는 그 대머리를 쳐다보다가 “저 대머리가 하느님의 모상이구나” 나는 감탄한다 “형님, 모상만 가지고는 안 되지 않아요?” “그 말을 할 수 있는 모상이면 되는 거야” 후천개벽하는 접견장이었다 1992. 8. 27.

  • 이수병 동지여

    - 4・19 32돌을 맞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당신이 서울운동장에서 청청한 목소리로 외친 지 어언 32년이 지났습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고 외친 일이 죄가 되어 당신이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도 눈앞이 깜깜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17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이때 1991년 4월 17일 당신의 옛 동지들이 당신에게 ‘사월혁명상’을 주었습니다 당신의 아내의 목에 빛나는 메달을 걸어 주었습니다 모임은 비록 조촐했으나 그건 가슴 뭉클하는 승리였습니다 활짝 웃는 당신의 눈에도 맑은 눈물이 고이는 게 보이는군요. 1960년 3월 15일 오후에 이미 마산 시민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일어섰습니다. 최루탄 직격탄이 눈에 박힌 어린 중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습니다. 드디어 4월 19일 민중의 분노가 터졌지요.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고 못 하는 일이 없던 이승만 도당 우리를 응징할 놈이 어디 있어 하며 권력을 마구 휘두르다가 민중의 분노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재갈이 풀렸던 것입니다. 그 순간 터져 나온 민중의 외침 그것이 당신의 청청한 목소리였군요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온 산천에 울리던 이 민중의 외침이 일년 만에 땅속으로 잦아들고 말았습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들의 눈에 그것은 혼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손에 일곱 동지들과 함께 죽어야 했습니다 그 처참한 죽음 앞에서 나는 60년 굳게 믿어 오던 하느님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쩌리오, 당신의 죽음으로 지켜 낸 정의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을 부인하면 인생도 없고 역사도 무의미한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정의의 뿌리에서 당신의 마음에서 나는 버렸던 하느님의 체취를 다시 내 코끝으로 맡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16년 깜깜한 세월이 흘러 당신의 목소리, 민중의 외침이 다시 터져 나오고 당신의 아내의 목에 메달이 걸리는 걸 보면서 우리는 드디어 정의의 승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7천만 겨레는 눈을 와짝 뜨고 강요당해 왔던 허위의식을 떨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군사분계선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불신이요 증오심이요 적개심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분계선이 지배자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그리도 서러웁게 애절하게 바라던 민족통일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남은 것은 절차뿐입니다. 이리 되자 우리 겨레의 적은 모든 위장을 벗어 버리고 그 흉악한 얼굴을 파렴치하게 마구 드러냈습니다. 미군은 2000년대가 지나도 물러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반대한다는 겁니다. 한반도를 영원히 분단 지배하겠다는 겁니다. 이수병 동지여 이제 우리는 겨레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미국놈들과 일본놈들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죽어 지내게 되느냐 아니면 자주 하는 민족으로 평화로운 아시아 새 질서의 초석이 되느냐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다시 외쳐야 합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외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군요. 온몸으로 미・일 외세를 물리치고 민중의 기반 위에 튼튼히 선 민주 정부를 세워 민족자주를 쟁취해 내야겠군요. 이리하여 통일운동 민주구국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수병 동지여 당신의 몸에 밧줄이 감기는 순간 온몸 부르르 떨며 이를 앙다물고 하늘이 쏟아지고 땅이 꺼지는 소리로 외친 민주, 자주, 통일 이제 그것은 7천만 겨레 모두모두의 쏟아지는 눈물이어라. 온몸 타오르는 불길이어라. -『사월혁명 회보』 18호(1992. 4)

  • 안동교도서에 와서 얻은 첫 시

    7월 4일이네요 오늘이 답답한 가슴 눈을 감으니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설경 온 산천을 포근히 뒤덮은 백설 아침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이네요 철창 너머 마당을 굽어보니 때묻지 않은 깨끗한 까치 발자죽들 반가워라 그건 생명의 소중한 자죽이었어 그런데 지축 울리는 둔탁한 소리 가슴을 쿵 울리더니 눈물 머금은 여인의 얼굴 까치 발자죽에 겹쳐지며 아슴히 떠오른다 경대 어머니의 얼굴이구나 까치 발자죽들에 핏물이 번진다 1991. 7. 4.

  • 통일은 다 됐어

    어머니 운명하시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박형규 목사가 문병 와서 통일 보고 가셔야죠 하니까 어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은 다 됐어 3차 고위급 회담이 별 성과 없이 끝났는데도 어머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암 말할 수 있구말구 기득권자들의 눈에는 보일 리 없지 겨레의 마음속 닫혔던 문 활짝 열린 것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치고 맞는 권투 경기가 끝나고 남과 북 두 선수의 눈물겨운 광경 못 봤어 이긴 남쪽 선수 진 북쪽 선수를 껴안으며 미안해 진 북쪽 선수 이긴 남쪽 선수에게 형 축하해 백림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거기서 분단의 장벽이 무너졌던 거 아니겠니 어머니 그렇군요 분단의 장벽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군요 불신 반목 질시 적개심은 마음에 있는 거니까요 제가 김일성 주석을 껴안았다고 해서 욕을 얻어먹은 걸 보시면서 어머니 염통에 불이 났엇지요 그것이 결국 어머니의 수명을 단축시켰던 거구요 그 때문에 내가 며칠 일찍 숨을 거두었단들 그게 뭐 대수냐 수경이를 껴안고 뒹구는 북쪽 겨레의 몸부림 속에서 나는 눈물로 온몸 녹아 내리는 걸 느꼈단다 그렇군요 어머니 북쪽의 겨레는 남쪽에 사는 우리를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게 되었군요 미워하지 않게 된 것만이 아니라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고 한겨레가 된 거지 한겨레가 된 것이 죽고 싶도록 행복한 거지 평양 소년궁에서 어린이 셋이 목에 메달려 엉 엉 울 때 저도 그걸 아프게 아프게 느꼈습니다 남쪽의 4천3백만 겨레도 같은 심정이라는 거 알지 않어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분단의 장벽 흔적도 없이 폭발시켜 버리기 직전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남북 두 축구팀이 국제 경기에서 만나면 그것은 살벌한 전쟁이었습니다 일본팀에게는 져도 북쪽팀에게는 질 수 없다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것이 남쪽 선수들이었습니다 미국팀에게는 져도 남쪽팀에게는 질 수 없다며 북쪽 선수들은 살기등등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여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세계축구사상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경기가 벌어졌습니다 잘 알고 있다 나도 거기 가서 울고 있었으니까 남쪽 선수들은 북쪽 선수들이 발목을 삘세라 북쪽 선수들은 남쪽 선수들의 다리에 생채기라도 날세라 연장전까지 1벽20분 경기를 반칙 한 번 없는 경기를 해냈거든 한겨레라는 것이 그렇게도 소중했던 거야 백두산이 언제 한라산을 미워한 일이 있었니 한라산이 언제 백두산을 향해 총을 겨눈 적이 있었니 압록강 금강 대동강 한강 물이 서해 바당에 가서 어울려 신나기만 한 거 아니겠니 두만강 낙동강 물도 동해 바다와 남해에서 어울려 출렁이다가 하늘로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남쪽 북쪽 가리지 않고 단비로 쏟아지는 거 아니겠니 태백산 줄기 억센 허리 언제 끊어진 일이 있었니 그렇군요 어머니 그렇군요 어머니 통일된 민족, 통일 대장정 만세 -「한겨레 신문」, 1991. 1. 1.

  • 사랑은

    사랑은 온몸 녹아 내리는 소금 한 톨의 쓰린 마음입니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얻어터진 불타 일그러진 활자 하나하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의 뼈 마디마디 머리칼 솜털 한 올 한 올까지 피 물든 강산입니다 눈을 감아야 아슴히 보이는 북녘 땅 구석구석까지 환히 빛내는 오월의 신록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첫사랑입니다 남누리 북누리 어우러져 신방 차리는 한누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봄도 없고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없습니다 오늘 창가의 참새 소리도 없습니다 내일 드높일 횃불도 없습니다 새누리 더더욱 없습니다 딛고 설 땅도 없습니다 마실 물도 없습니다 쳐다볼 산천도 하늘도 없습니다 눈물겹게 꼭 잡아 줄 손 하나 없습니다 목련꽃 웃음소리 같은 건 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맛 잃은 소금 무슨 맛으로 한세상 꿈을 꾸며 삽니까 꿈도 없는 세상 무엇을 바라 숨인들 쉽니까 그러나 여기 굵은 소금 한 움큼 있습니다 찢어진 상처 상처로 스며드는 아픔으로 사랑의 통곡 있습니다 막혔던 숨통 터지며 가슴 가슴으로 번져 가는 희망 또한 있습니다 산곡 굽이굽이 피어나는 진달래의 숫된 아름다움 여기 있습니다 아 하느님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감히 감사해야 하는 겁니까 -「새누리 신문」, 1991. 5. 11.

  • 내 조카라면

    월드컵 탁구대회 남자부 준결승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선수대기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리분희(22세, 세계 랭킹 3위) 현정화(21세, 세계 랭킹 4위) 너무너무 다정스럽구나 분희 난 상꺼풀도 아니고 코도 납작한데 정화 너는 코가 예쁘다고 했다지만 난 분희 코를 잡고 흔들어 주고 싶구나 한 가지에 나란히 핀 소담스런 백목련처럼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구나 분희 왼손 잡고 정화 오른손 잡고 평양 거리를 거닐고 싶구나 서울 거리를 거닐고 싶구나 니네들 내 조카라면 얼마나 좋으랴 니들 앞에서 목련꽃 웃음 날리며 눈을 감고 새 세상 좋은 세상 꿈꾸고 싶구나

  • 어느 한 눈송이의 사연

    어느 한 눈송이의 사연 싸늘한 내 손에 내려 앉아 눈물 한 방울도 안 되는 물기만 남기고 사르륵 녹는 여린 마음이라네. 강아지 눈썹에서 나풀대는 어느 눈송이 하나 덧없는 인정에 옷깃이 팔락인다.

  • 시집을 펴내며(두번째 시집 『꿈을 비는 마음』 서문)

    시집을 펴내며      여기에 실린 시들은 거의가 차디찬 골방의 마루바닥을 맨손으로 파서 기록한 것들이요, 빠끔히 내다보이는 철창가 하늘 저편에 피맺힌 목청으로 부조한 아우성이지 붓으로 골라 쓴 시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기에 실린 것들은 한 시인의 의식의 분비물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심장, 혈관이 터져 쏟아져 나온 핏발들이어서 보고 듣는 이의 가슴을 섬짓하게 한다.   그러나 웬일인가, 행동하는 문익환, 싸우는 문익환의 현실과 그의 시세계는 또 이처럼 엄청 난 괴리감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 시집은 시인 문익환의 영적 작업의 또 하나의 쌓임이기 전에 차라리 백발을 휘날리는 그분을 감히 백주대낮에 한오라기도 남기지 않은 채 발가벗겨 놓은 나상일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제 시인 문익환은 이처럼 발가벗은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마구 다가섰으니, 이 한 권 시집은 책장이나 장식하는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되겠다. 이 한 권 시집은 일하는 일꾼들의 땀으로 흠뻑 젖어야 하며 인간적 삶을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핏방울에 얼룩지고 그리고 배우는 사람들의 눈초리로 활자가 마멸될 때까지 그 순수, 그 열정, 그 엄청난 민족통일에의 갈구는 민족사와 함께 전진해야 할 것으로 믿고 떳떳히 세상에 펼쳐 보인다.   1978. 3. 15. 펴낸이

  • 정병환 씨

    마흔네 살 한창 나이도 훨씬 넘은 정병환씨에게 서울 서초구 화물터미널 정기화물취급소는 창살 없는 감옥이란다 2.5톤 트럭 쉰 대에 실릴 화물을 지어 나르는 하역 작업은 하루 열여섯 시간 뼈 빠지는 초중노동 월수 40만원 부부 맞벌이로 겨우 생계를 유지한단다 우두둑하는 당신의 등뼈 태백산 줄기처럼 든든하거라 <1989.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