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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문익환』 2023년 11월호(eISSN 2951-2123)

    아카이브 기반 콘텐츠 제작단 '콘텐츠플러스'가 기획·제작하고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사료제공 및 제작을 지원하여 발간한 『월간 문익환』 2023년 11월호(통권 제19호). 40년차 문익환 덕후,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을 만든 류형선 작곡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1991년 4월, 연세대 대강당. 청년 류형선은 문익환 목사 바로 앞에서 헌정곡 ‘그대 오르는 언덕’를 부르게 됩니다. 예정에 없던 돌발 상황. 가수도 아닌 작곡가가, 그것도 노래의 주인공 늦봄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불러야 한다니... 목사님의 눈도 못마주치며 새색시 처럼 수줍게 노래를 마치자, 늦봄이 무대위로 천천히 올라왔습니다. 그리곤 가만히 청년의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가능성 앞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온통 가능성일 뿐이다”   ‘문익환 덕후’였던 청년의 마음 한가운데를 관통한 이 한마디는 그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이제 중년이 된 작곡가에게 아직도 ‘덕질’을 계속하는 이유를 묻자 유쾌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어쩌겠어요, 이미 사랑해 버린걸~” 『월간 문익환』 11월호엔 40년째 ‘덕질’중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목차> · 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인터뷰) - 류형선 <1-3면> · 과거에서 온 편지 - 1979년 11월 16일 문익환 편지. ChatGPT에게 늦봄을 물었더니 <4면> · 그때 그곳 - 종로5가 기독교회관 <6면> · 수장고 통신 - 수장고 소독 작업 <7면> · 늦봄의 서재 - 서경식 『옥중서간집 2: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않고』 <7면> · 시 속의 인물 - 리영희 교수 <5면> · 나와 늦봄 - 통일의 집 마당봉사 황경선 본부장 <8면> · 이달의 사건 - 1990년 방북 수감 후 석방<8면>

  • 늦봄 문익환 목사 성가집

    문익환 목사가 기존 찬송가 곡조에 맞춰 옥중에서 지은 노래 가사들을 모아 만든 성가집. 영광의 주, 이 작은 가슴 외 13곡의 가사모음으로 대부분 1982년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관련하여 구속되었을 때의 작품. 후에 류형선 작곡가가 문익환이 작시한 가사에 새로운 곡을 붙여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2000, 2011)을 발간했다.  목차 영광의 주, 이 작은 가슴, 평화의 씨앗, 임마누엘 오소서, 애기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역사의 새아침(해방의 노래), 문 두드리는 소리, 예수를 위해 삽시다, 평화의 누룩, 주기도송, 뜨거운 마음, 주의 가정, 부활절 아침에

  • 『월간 문익환』 2023년 10월호(eISSN 2951-2123)

    아카이브 기반 콘텐츠 제작단 '콘텐츠플러스'가 기획·제작하고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사료제공 및 제작을 지원하여 발간한 『월간 문익환』 2023년 10월호(통권 제18호). 늦봄·봄길의 며느리라 참 좋았다는 정은숙 성악가를 만났다. <목차> · 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인터뷰) - 정은숙 <1-3면> · 늦봄의 서재 - 이오덕 『우리글 바로 쓰기2』 <4면> · 시 속의 인물 - 조화순 목사 <5면> · 이달의 사건 - 1990년 방북 수감 후 석방<6면> · 이웃 아카이브 탐방 -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7면> · 나와 늦봄 - 아카이브센터 정혜지 센터장 <8면>

  • 네 번째 시집 『두 하늘 한 하늘』의 정오표

    문익환 목사의 네 번째 시집 '두 하늘 한 하늘'(1989)의 오자를 수정해 줄 것을 창작과비평사 편집담당자에게 보낸 팩스 원문.  발신자: 문성근, 박용길

  • 『월간 문익환』 2023년 9월호(eISSN 2951-2123)

    아카이브 기반 콘텐츠 제작단 '콘텐츠플러스'가 기획·제작하고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사료제공 및 제작을 지원하여 발간한 『월간 문익환』 2023년 9월호(통권 제17호). 『미리 만나는 겨레말 작은 사전』 출간을 맞아 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상임이사 정도상 작가를 만났다. <목차> · 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인터뷰) - 정도상 <1-2면> · 과거에서 온 편지 - 1981년 9월 7일에 쓴 박용길의 편지(금식 중인 문 목사 면회) <4면> · 시 속의 인물 - 통일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 <5면> · 그때 그곳- 한빛교회 <6면> · 이웃 아카이브 탐방 - 대통령기록관 <7면> · 나와 늦봄 - 행사 기획·연출 최소진 대표 <8면> · 이달의 사건 - 9월에 별이된 세 분의 어머니 김신묵, 이소선, 박용길 <8면>  

  • 문익환 목사 한빛교회 30주년 기념예배 설교 원고

    문익환 목사 한빛교회 30주년 기념예배 설교 "오던 길을 그대로 가자" 원고 (빌립비 3장 16절 "어쨌든 우리가 이미 이룬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 같이 앞으로 나아갑시다.") 오던 길을 그대로 가자 지금까지 달려오던 길을 그대로 달려가자고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권고합니다. 지금까지 달려오던 길이 잘못된 길인데도 그대로 가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면 돌아서든지 새 길을 찾든지 해야지요.  오던 길에 주저앉지도 않고 그대로 가자고 하는 까닭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은 “지금까지 살아온 확신을 따라 그대로 앞으로 밀고 나가자”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때까지 걸어온 길은 어떤 것이었던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 선생으로서 존경을 받으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바울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시밭길, 고생길에 들어섰으니까요. 그는 고린도에 있는 신앙의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준한 길이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고후 11:23 상반절).  여기서 그들이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라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나는 그들보다 고생을 더 많이 했습니다. 감옥에도 더 많이 갔고 매도 수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11:23 하반절)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받은 고생을 열거합니다. 서른아홉 대씩 맞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나 되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를 표류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끝도 없는 여행에 강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라 사경을 헤매었고 헐벗은 몸으로 추위에 떠는 일도 수없이 겪었다고 합니다(11:24~27).  사람들은 저더러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겪은 고생은 바울이 거쳐온 고생에 비하면 약과지요. 거의 호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바울은 계속 그 길을 같이 가자고 합니다.  얼마 전 젊은이들이 저더러 다시는 감옥에 가지 말라고 하기에 저도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님이 “그게 무슨 소리야! 갈 일이 있으면 가야지”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그러시는데 안 갈 수 있겠어요? 바울은 그 어렵고 괴로운 길을 가도 기뻐하면서 가자고 합니다. 그는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님과 함께 노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빌 4:4).  이렇게 되면 바울은 제정신이 아닌 거죠. 정말 미친 사람이라고 해야겠지요. 어떻게 제정신을 가지고서야 그 고생을 좋아서 하겠어요?  그런데 세상에는 제정신을 가지고 그 고생을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옳은 일이라는 확신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난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서 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주신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 일이라고 합니다. 등산객이 높은 산정에 다달아서 맛보는 기쁨만이 기쁨이 아닙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타는 기쁨이 더 중요하지요. 산정에 다달아 맛보는 기쁨은 등산의 전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의 절정일 뿐이지요.  지난 2월 12일은 우리 민족사에서도 길이 기억될 날입니다. 10년 체증이 뚫리는 통쾌한 기쁨을 우리 모두 느꼈습니다. 10년 체증이 아니죠. 20년 체증이 뻥 뚫리는 승리를 우리 국민은 한아름 안았던 것 아닙니까? 제 아버지, 어머니 90 평생에도 그렇게 좋았던 날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사슬에서 이 민족이 해방되던 날의 기쁨과도 견줄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던 날의 감격도 컸지요. 1978년 총선거에서 이 겨레가 야당에게 1.1% 표를 더 줌으로 해서 집권 정당인 공화당을 불신임했다는 소식을 저는 서울 구치소에서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것으로 퇴진을 강요당한 박 정권은 열한 달을 버티다가 무너진 것 아닙니까?  이번 선거의 승리는 40년 동안 억압받아 오던 민주주의가 칠전팔기해서 독재를 KO시킨 일이 었습니다. 40년 동안 짓밟히기만 하던 민중이 짓밟던 구둣발을 집어 내동댕이친 일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열한 달을 기다릴 것 없이 당장 퇴진해야 합니다. 총투표수의 35%를 차지한 정당이 어떻게 전국구의 3분의 2를 차지할 수 있습니까? 벼룩도 낯짝이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은 가 보죠. 어불성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35%라는 것도 완전히 조작된 부정 아닙니까?  이 땅에서 가장 억울한 것이 농민입니다. 지금 농촌에서는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갑니다. 농촌의 처녀들이 도시로 몰려들어서 고생하는 처절한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최장시간 노동하는 공장에서 온갖 직업병으로 몸을 망치며 일해도 백 명에서 여든다섯은 월 10만원도 못 받으며 기계처럼 소모되어 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농촌에 있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면, 농촌의 참상이 어떠냐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아요?  그렇게 가장 억울하고 처참하게 고생하는 농민들, 도시민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서 완전히 희생당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농촌을 지키는 농민들이 민정당에 표를 많이 던졌다는 것을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공명선거를 했다면 민정당은 열 사람도 당선될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원천적인 부정 선거요, 완전한 타락 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한민주당은 창당 25일 만에 선거운동다운 운동도 없이 민정당 87석에 50석으로 육박해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도 세계 선거 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민족은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낸 것 입니다. 민권 승리가 어떤 것이냐고 묻거든 1985년 2월 12일 한국 땅에서 벌어진 총선이 바로 민권 승리라고 대답하십시오.  이 뜻깊은 민권의 승리를 안고 우리는 한빛교회 3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금번 총선거에서 전취한 민권 승리는 바로 한빛교회의 승리입니다. 왜냐고요? 이번 선거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이 민족의 가시밭길을 한빛교회는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고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한빛교회는 온갖 폭력에 항거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수난사의 한복판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실천으로 이 수난사의 한복판을 뚫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씨앗을 뿌리며 신앙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한빛교회 교우 여러분의 확신은 옳았습니다. 그 확신이 옳았고, 그 확신을 굽히지 않고 사느라고 고생도 많았습니다. 고생이 컸던 만큼 오늘을 맞이하는 기쁨도 큰 거죠. 금번 선거의 승리를 기뻐하는 기쁨도 그만큼 더 큰 거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 확신이 옳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확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 확신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앞으로 가시밭길을 헤치며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밭길을 같이 헤치며 나가는 기쁨도 남에게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확신을 따라 지금까지 걸어온 이 길을 그대로 전진할 뿐입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이 확신, 이 승리의 기쁨을 안고 도달해야 할 고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민주 정부의 수립입니다. 저는 현정부가 진정으로 민주 정부가 되어 준다면, 구태여 퇴진하라고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두환 정권이 민주적인 정권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 정권이 되기를 기대하느니 검정 개가 흰 개가 되는 것을 기대하지요.  민주 정부를 세우고 이 나라를 민주화하는 일은 그대로 갈라진 민족을 통일하는 일입니다. 갈라진 민족을 통일하는 일은 온갖 분쟁 요인을 제거하는 일이요,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입니다.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곧 평화의 왕, 예수의 복음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이제 서른 살을 먹은 한빛교회는 이 엄청난 일을 해내리만큼 자랐고 힘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이 민족이 통일의 관문을 통과하는 날, 한빛교회는 비록 작지마는 또다시 마땅히 할 일을 해냈다는 기쁨을 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확신, 그 기쁨을 안고 또다시 통일된 새 나라 건설에 발벗고 나서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같은 영광스러운 한빛교회 교인이라는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다 같이 일어서서 결단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 한빛교회 30주년 기념 예배 설교(1985. 2. 17)   

  • 김경숙 6주기 추모식에서 추도사하는 문익환 목사

    김경숙 6주기 추모식에서 추도사하는 문익환 목사(1985. 8. 11) ※ 김경숙 열사(당시 21세)   1958년 6월 5일 전라도 광산군 비아면에서 부 김용귀씨와 모 최영자씨의 장녀로 출생 1965년 부친사망으로 행상, 가사 전담 1971년 초등학교 6학년때 광주에 있는 누에고치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 1973년 서울로 상경. 양동에 있는 하청 제품공장,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하며 봉제공장 미싱사로 노동함 1976년 8월 30일 YH무역(주) 입사.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YH무역은 위장폐업 자행. 1977년 6월 YH 노동조합에서 설립한 녹지야학 입학 1978년 3월 YH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선출 1978년 7월 YH 노동조합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활약 1979년 3월 30일 YH 무역 일방적 폐업공고 발표로 YH 사건 시발 1979년 4월 13일 YH 노조 폐업철폐 공장점거 농성. 5일동안(폐업1차 철회함) 동지는 후생부 책임담당으로 활약함 1979년 7월 25일 회사 정상화를 위한 노조 대의원대회 대회사 정상화 추진위원 56명 구성 위원으로 활약 1979년 8월 9일 신민당 당사 점거농성 투쟁 전개.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2천여명의 경찰이 ‘101호작전’에 의해 신민당사에 난입,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의문사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 정보 https://www.kdemo.or.kr/patriot/name/ㄱ/page/4/post/165)

  • 박용길 장로 여신도회 수첩

    [사진1] 박용길 장로가 즐겨 사용하던 여신도회 수첩(다이어리).  [사진2] 1976년의 수첩. 3.1구국선언사건으로 수감된 구속자 부인들이 재판 때 시위한 방법을 적었다. 10회 때는 ‘민주회복 붓글씨’를 활용하고, 11회는 ‘빅토리숄’을 시위 도구로 사용했다. [사진3] 1992년 2월 셋째 주의 일정. 보낸 편지 번호와 그날그날의 일정을 메모했다.

  •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집회에 참석해 단 위에 서있는 오충일, 계훈제, 문익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집회에 참석해 단 위에 서있는 오충일, 계훈제, 문익환(1988. 8. 28)

  • 3.1 민주구국 구속자 가족 시위에 사용하기 위해 붓글씨를 쓰고있는 김석중, 박용길, 박영숙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남편들의 석방 시위에 사용할 붓글씨를 쓰고있는 김석중(이문영), 박용길(문익환), 박영숙(안병무). 상징인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1976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