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1747건이 검색되었습니다.

  • 예수의 기도-5

    비록 티끌 같은 것들이지만 저희더러 이 땅의 이 깜깜한 땅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까 주여 태백산 줄기를 굽이굽이 휩쓸다가 순식간에 동해바다 서해바다를 들끓게 하는 어두움에 숨소리도 없이 삼키울 한 대 촛불입니다 우리는 생겨날 때 이미 타 없어지기로 운명지워진 몸들이기에 아까울 거야 없읍니다 마는 절벽처럼 버텨 선 저 어둠 물러설 날이 있을 건가요 주님 착하고 어진 마음씨야 어차피 포악한 주먹에 박살나도록 운명지워진 몸들이기에 무서울 거야 없읍니다 마는 햇순 돋아나는 대로 짓밟아 버리는 저 구둣발들 물러설 날이 있을 건가요 주님 어차피 땅에 묻혀 썩을 피라면 차라리 흰 눈 위에 눈부시게 뿌리고 죽는 편이 백번 나을 줄 알기에 주저할 건 없읍니다 마는 우리의 피를 받아 삼키려는 스올*의 저 목구멍 닫힐 날이 있을 건가요 주님 당신만이 역사의 주라는 걸 믿으라고 하십니까요 이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정의의 태양이 불끈 솟아오를 날 사랑의 햇살이 황금빛 깃을 활짝 펼 날을 믿고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기다리고만 있지 말아라 정의의 샘 구멍을 뚫어라 사랑의 샘 줄기를 터라 고 하십니까 정의가 한강 물처럼 흐르게 사랑이 대동강처럼 흐르게 어둠의 절벽이 아무리 높아도 그 앞에 무릎을 꿇 수야 없지 않느냐 구둣발 소리 아무리 무서워도 움츠러들 수야 없지 않느냐 스올*의 목구멍이 온 세상을 삼키려고 한대도 그 앞에 젯상을 차리고 엎드릴 수야 없지 않느냐 고 하십니까 그야 그렇지요 그러나 어쩌면 좋습니까 그날이 오기 전에 시들어 떨어지는 저 꽃송이들을 숨이 막혀 터지는 저 가슴들을 땅에 영영 묻혀 버리는 아름다운 꿈들을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스올>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던 <죽음의 신>  

  • 예수의 기도-4-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바람이 없으면 깃발은 축 늘어지지요 바람이 불어야 깃발은 살 맛이 나는 거죠 솔솔 봄바람이라도 불면 어깨춤이 저절로 나지요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이거야 무당처럼 신나는 일이지요 펄럭이다 펄럭이다 마구 찢어진다고 움츠러들 것 같읍니다 천만에요 갈기갈기 찢어진 자락 그것이 바로 깃발의 자랑인 걸요 깃대가 부러지면 더 굵은 걸로 갈면 그만인거구요 북풍한설 눈보라라도 휘몰아치면 가슴마저 화끈 달아오르지요 바람이 바로 당신의 입김인 걸요

  • 예수의 기도-3

    이 추운 신새벽 당신은 또다시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시는군요 이 서러운 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시며 만나는 사람마다 손목 잡고 눈물 글썽이며 용서를 빌려고 하느님 저도 당신의 뒤를 따라 나서지요 당신이 잡았다가 놓으시는 손목 하나하나 잡고 저도 용서를 빌며 떠돌다가 어느 길가에 쓰러져 죽는 걸 용납해 주지 않으시겠읍니까

  • 예수의 기도-2

    누리의 큰마음이시여 뜨거운 불길로 타오르시옵소서 평화로 다스리시옵소서 누룩으로 번져 나가시옵소서 고른 이슬로 오시옵소서 큰 뉘우침으로 얼싸안아 주시옵소서 찢어진 깃발로 펄럭이시옵소서 큰 슬픔으로 분단의 비극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 (제4부) 예수의 기도-1

    사람들의 깜깜한 하늘에서 빛을 바라는 애타는 염원만으로 불타시는 하느님 동해 바다 깊이로도 헤아릴 수 없고 태백산 줄기 높이로도 잴 수 없는 이 겨레의 슬픔 몰라 주셨더라면 저는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돌아서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우리의 슬픔이시여 이 아침에도 당신의 슬픔 이 푸른 옷깃에 스며 와 온몸으로 와들와들 떨고 있읍니다 이 슬픔 풀잎에 맺힌 이슬 방울 하나밖에 안되지만 당신의 바다 같은 슬픔에 던져 봐야 함께 뒤채다가 몸부림치다가 태백산 밑둥을 흔들어대다가 한낱 물거품으로 스러질 뿐이지만

  •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나는 어제 저녁 정말 무서운 사람을 만났읍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서 이야기를 듣던 에비장군보다도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을사년 흉년 때 어머니의 외할머니를 물어간 백두산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사람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남자가 아니었읍니다 눈물 많은 여자였읍니다 어린애가 둘이나 딸린 젊은 여자였읍니다 남편은 유리 조박에 다리가 찢겨 기부스라는 걸 한 채 병원에서 까막소라는 데 끌려가있답니다 날마다 공장이라는 데 나가 일을 해야 하는 몸이라서 아이 하나는 친정에 보냈고 하나는 시댁에 맡겨 놓았답니다 이 여인은 돌아갈 집마저 박살나 버린 셈입니다 밤이면 돌아가서 썰렁한 방에서 쿨쩍쿨쩍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잠드는 곳을 집이라고 할 수야 없지요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그 여자는 별로 악을 쓰지도 않고 이 말을 했읍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호소하는 투도 아니었읍니다 차라리 껌껌한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같았읍니다 약간 몸서리가 쳐지는 소리였읍니다 그 여자는 오늘도 내일도 공장에 가서 백안시당하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시댁에 맡겨 둔 두 살박이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친정에 갖다 둔 다섯 살짜리 장난꾸러기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기부스가 얼어들어오면 얼마나 추울까 혼자선 변소 출입도 못할 텐데 이런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는 눈 깜빡할 사이에 손이 짤려나갈지도 모르니까요 이렇게 그 여자는 반 발자욱도 뒤로 물러설 수가 없읍니다 아니 반의 반의 반 발자욱도 뒤로 물러설 자리도 틈도 세상은 그 여자에게 주지 않습니다 반의 반의 반의 반 발자욱이라도 물러서는 순간 그 여자의 앞에 맞서 있는 열 키도 넘는 절벽이 무너지겠기 때문입니다 그리 되면 순이도 진이도 애기 아빠도 무너지는 절벽에 묻히고 맙니다 그 절벽이 가슴에 섬찟 와 닿는 칼날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칼 끝이 가슴을 파고 들어도 한 걸음이나마 앞으로 내디딜 수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 꼬꾸라지며 피를 쏟고 죽을 수라도 있을테니까요 그 절벽이 한 백 리쯤 뻗어 있는 가시밭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온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여나믄 자쯤이야 헤치고 나가다가 쓰러질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절벽이 불길이라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 불길에 몸을 던져 순이를 부르며 진이를 부르 며 훨훨 타오를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여자는 반 발자욱도 내디딜 자리가 없읍니다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읍니다 다만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 전태일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 태일이다 한국의 산악들아 강들아 들판들아 마을들아 한국의 소나무야 자작나무야 칡덩굴아 머루야 다래야 한국의 뻐꾸기야 까마귀야 비둘기야 까치야 참새야 한국의 다람쥐야 토끼야 노루야 호랑이야 곰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은 전 태일이다 백두에서 한라에서 불어 오다가 휴전선에서 만나 부둥켜안고 뒹구는 마파람아 높파람아 동해에서 서해에서 마주 불어 오다가 태백산 줄기에서 만나 목놓아 우는 하늬바람아 샛바람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뭐 다르겠느냐 우리의 이름도 전 태일이다 깊은 땅 속에서 슬픔처럼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물어야 알겠느냐 한국 땅에서 솟아나는 물방울치고 전 태일 아닌 것이 있겠느냐 가을만 되면 말라 아궁에도 못 들어갈 줄 알면서도 봄만 되면 희망처럼 눈물겨웁게 돋아나는 이 땅의 풀이파리들아 너희의 이름도 전 태일이더냐 그야 물으나 마나 전 태일이다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너희의 이름이야 물론 전 태일일 테지 여부가 있나 우리가 전 태일이 아니면 누가 전태일이겠느냐 어찌 우리의 숨결뿐이겠느냐 우리의 맥박도 야위어 병들어 가는 살갗도 허파도 염통도 발바닥의 무좀도 햇빛 하나 안 드는 이 방도 천장도 벽도 마루도 삐걱거리는 층계도 똥 오줌이 넘쳐 냄새 나는 변소도 미싱도 가위도 자도 바늘도 실도 바늘에 찔려 피나는 손가락도 아- 깜깜한 절망도 그 절망에서 솟구치는 불길도 그 불길에서 쏟아지는 눈물도 그 눈물의 아우성 소리도 무엇 하나 전 태일 아닌 것이 없다 전 태일이 아닐 때 우리는 배신이다 죽음이다 우리는 살아도 전 태일 죽어도 전 태일이다 빛고을에 때아닌 총성이 요란하던 날 학생들 손에서 총을 빼앗아 들고 싸우다가 전사한 양아치들아 너희들도 당당한 전 태일이었구나 먹을 것 마실 것 있는 대로 다 내다가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 새신랑 맞는 처녀의 가슴으로 떨리기만 하던 티상(창녀)들아 너희들도 청순하고 자랑스런 전 태일이었구나 전 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 고은이 장가를 든다네

    고 은이 장가를 든다네 허 허 허 고 은이 장가를 든다네 바람더러 너나들이로 떠돌더니 바람이 바람 만나 고 은이도 장가를 든다네 정들은 등짐 등때기 한 몸이어라 골골이 굽이굽이 흐르는 시름으로 푸른 물이 푸른 물 만나 고 은이도 장가를 든다네 한국의 하늘 능지처참의 아픔으로 팔도 강산 떠돌던 몽구리 돌중 거름더미 똥 내음 시큼한 인정이어라 드디어 발바닥이 발바닥 만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고 은이도 장가를 든다네 고 은이 장가들어 색시 품에 허물어지는 일 없으면 아무것도 뜻 없읍니다 그리운 그리운 민주주의도 뜻 없읍니다 목메는 목메는 민족 통일도 뜻 없읍니다 개나리 진달래 파릇파릇 잎 피는 늦봄 저문 산골 황소 앞세워 구시렁 구시렁 돌아오는 새서방 새각시의 뜨거운 마음 열나는 사랑이 민주주의의 뿌리입니다 민족 통일의 쇠북소리입니다 닫혔던 가슴들 오늘일랑 청봉 올라 하늘이 되어 소나기로 쏟아져 금강산 울리는 평화의 눈물입니다  

  • 오직 절망만으로

    찢어지는 땅의 아픔 밤하늘의 별무리 같은 슬픔 만나 이슬 방울로 눈물 짓는 아침 눈물겨웁구나 눈물 빛나누나 오직 절망만으로 절망을 울 뿐인 속으로 삼키는 눈물들의 천 길 벼랑 차라리 거꾸로 곤두박히고 싶어라 무너지는 마음 버티며 어둡게 어둡게 핀 한 송이 풀꽃의 온몸 떨리는 눈빛 아- 벼랑 울리누나 먼 산 메아리 울리누나 부서져 쏟아지는 별들의 꿈 바다 울리누나 영겁으로 뒤채는 바닷속 눈먼 어두움 울리누나

  • 민족 통일

    하늘을 땅이라고 우겨대는 이 양반아 네 말이 맞다 맞고 말고 하늘이 땅이라면 땅 또한 하늘인 거지 밤을 낮이라고 우겨대는 이 양반아 네 말이 맞다 맞고 말고 밤이 낮이라면 낮 또한 밤인 거지 소태를 꿀이라고 우겨대는 이 양반아 네 말이 맞다 맞고 말고 소태가 꿀이라면 꿀 또한 소태인 거지 빵을 자유라고 우겨대는 이 양반아 네 말이 맞다 맞고 말고 빵이 자유라면 자유 또한 빵인 거지 제 동기를 원수라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이 양반아 네 말이 맞다 맞고 말고 동기가 원수라면 원수 또한 동기 아니겠는가 너나없이 다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 자취도 없이 허물어져 섞이고 말 한 겨레인 거지 같은 사람인 거지 치고 받으며 서로 찔러 죽이던 원수들도 땅에 남긴 발자죽들이야 그게 그것 아니던가 같은 하늘을 숨쉬며 산으로 솟아나고 강으로 흘러 한 마음인 거지 밤이면 이슬을 맞으며 별을 세고 낮이면 같이 땀 흘리며 거친 땅 일궈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슬픔인 거지 기쁨인 거지 사람이 어찌 꿀만 달다고 하겠는가 인생은 길어서 여든 아니면 아흔 고해라고들 하는데 같이 눈물을 흘리며 소태를 나누어 먹는 일 또한 인생의 유별난 맛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