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그림엽서에 대한 이해

근대 사진그림엽서의 발행

| 근대 사진그림엽서의 발행

 지금 우리는 말과 글, 사진과 그림, 그리고 동영상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매일매일 변화하는 기술의 발전은 매우 빠르고, 그에 따라 각종 매체를 통한 정보전달의 방법도 변화가 계속된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각종 정보가 공유되고 전파된다. 그렇다면 100년 전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정보는 어떻게 주고받으며 소통했을까?

 근대에 접어들어 대중이 정보전달의 매체로 가장 애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엽서(葉書, Post Card)'이다. 당시 엽서는 낱장의 인쇄물로 발간되었는데, 앞면에 사진이나 그림이 인쇄되어 있어 사진엽서라고 부르거나, 사진그림엽서라 일컬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은 줄곧 한국의 자연경관과 관광명소, 도시의 모습, 주요시설(SOC) 등을 엽서 속에 담았다. 따라서 사진그림엽서 속에는 당시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은 물론이고 도시의 경관 변화 양상과 주민의 생활 모습 등이 잘 담겨있다. 이는 근대의 역사 문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로 활용된다.

 모던니즘의 시기에 일제가 사진엽서를 발행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이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일제가 자신들이 변화시킨 조선(근대화된 조선의 모습)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려고 제작한 '의도된 정치적 시선의 산물'로 이해하거나, 단순히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일본에 거주하는 자국민에게 홍보하려던 상업적 산물의 결과 중 하나로 치부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당시에 발간된 사진그림엽서가 단순한 예술 감성의 산출물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통치를 위한 장치로 작용했다는 데 많은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발행 의도에 따라 일제강점기 엽서는 관(官)에서 직접 제작한 것과 상점 등에서 만들어 판매한 사제엽서로 나눌 수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엽서는 1900년 05월 10일 대한제국 농상공부인쇄국이 발행한 것으로 관제엽서에 해당한다. 그러나 1905년 일제에 의해 우편업무가 장악되면서 엽서 발행은 중단되었다. 이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 시작한 일제는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취임을 기념하며 통감부 주도로 발행한 사진그림엽서를 제작 및 배포했다.
 사제엽서의 발행 시기도 관제엽서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1900년 10월, 우편법 개정에 의해 사제엽서의 발행이 허가되면서 사진그림엽서는 전국적으로 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샤를 알레베크란 인물이 제작한 '알레베크 사진엽서'가 존재하나, 알레베크의 엽서는 개인이 대한제국 정부 대리인 역할로 대외 홍보용을 제작했던 것이기에 국내에 한정하면 최초라고 보기에 한계점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본 글에서 한반도 즉 대한제국 내에서 유통되었던 사제엽서와 관제엽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당시 전국에서 사제엽서 발행은 유행처럼 번졌다. 초기에는 중앙 행정관청이 위치한 지역 단위로 엽서가 탄생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범위가 점차 넓어졌다. 일례로 1906년 군산에 이사청이란 식민통치 기구가 설치된 후 군산을 중심으로 금강수계 권역에 위치한 보령과 부여, 공주, 부강의 사진그림엽서가 발행되었다. 이 당시 엽서하단에는 제목과 함께 발행처가 별도로 표기되곤 했는데, 주요 발행처는 사진관과 서점, 엽서조합 등이 많았고, 때때로 문구점과 제과점 등 특정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도 확인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사진을 많이 다루는 사진관과 사진을 상품으로 개발하여 활용한 곳에서 엽서를 발행한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다양한 발행처만큼이나 사제엽서는 사진그림엽서의 유행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를 통해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그림엽서는 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엽서가 대중화됨에 따라 민(民)의 영역에서 사제엽서를 제작·발행하는 것으로 발행주체의 변화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엽서 속 공주를 바라보다>, 국립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일제강점기 한국 사진그림엽서의 탄생과 엽서의 분류 및 시대구분법에 대한 소고>, 신동규
<사진엽서로 보는 근대풍경>, 부산박물관

ⓒ 2024. 오건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