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비스트의 발견
취미 활동도 아카이브가 되나요
아카이브센터
게시일 2022.11.25  | 최종수정일 2022.11.25

각자의 데이터로만 저장되어 있던 기록이 서로 연결점을 갖게 되면 새로운 의미와 지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키비스트의 발견>은 여러 아카이브에서 공개하는 기록과 콘텐츠를 살펴보면서 발견한 연결점을 새로운 맥락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코너입니다.

 
'기록'이라 하면 대개 학술 기관이나 연구 단체를 떠올리곤 합니다. 기록을 체계화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에도 ‘학술’이라는 고정관념이 따르는 편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디지털 아카이브는 학술 분야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평범한 개인의 삶에 관한 모든 기록을 담을 수 있는 기능성 도구로 활용 가능합니다. 개인의 디지털 일기장이 될 수도 있고, 직업 정보를 기록해두는 디지털 수첩이 될 수도 있고, 각자의 취미활동을 교류하는 디지털 사랑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취미활동을 어떻게 디지털 아카이브로 만들 수 있으며 어떤 용도로 활용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를 보겠습니다.


 
컬렉터들을 위한 공간:
myvinyl 아카이브
 
 
myvinyl 아카이브의 컬렉션 화면. 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이 공간은 오래된 레코드판(바이닐)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개인 아카이브로, 앨범들의 커버 디자인에서 20세기 연식이 느껴집니다. 당연히 음악을 감상하는 방식도 고전적입니다. 음반 수집가들은 커버에서 꺼낸 레코드판을 극세사 천으로 닦은 다음 턴테이블에 얹고 바늘을 정확한 위치에 올려야 하는 수고스러움마저 음악 감상의 한 절차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음반을 수집하는 목적은 분명 음악을 듣기 위한 것일텐데 주인장은 왜 굳이 이런 기록 공간을 만들었을까요.
그럴싸한 이유야 여러 가지 댈 수 있겠지만, 알고 보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담겨있는 물리 매체를 '수집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디지털 아카이브는 바이닐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진짜 목적은 모으고, 수집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컬렉터들이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든다면 어떤 형태일지 고민하고 실험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은 어떤 물건을 수집하나요?
대문글을 보니 주인장은 음악 감상과는 별개로 음반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컬렉터들이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타인과 교류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공간에 도전하고 있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각 음반에 관한 기록 정보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담은 ‘한줄평’의 내용을 보니 그 ‘소통’의 의지가 좀 더 뚜렷해 보입니다.
 
Eric Dolphy‎_At The Five Spot Volume 1. 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한줄평]
-Groove Merchant 레이블의 간판스타, George Freeman의 그루브한 연주 끝장판!
-소니 롤링스(Sonny Rollins)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흥겹고 그루비한 테너 색소폰 연주를 느낄 수 있는 앨범. 1962년 발매 당시에 나온 오리지날 스테레오 버전을 보유하고 있다. 자랑이다.
- 혹자는 음악애호가는 두 종류로 나뉜다고 말한다. Joni Mitchell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그러나 나는 그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다. Joni Mitchell의 Blue을 들어봤다면,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Joni Mitchell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음악애호가가 아니다.
-포스트밥 시대를 이끌었던 Art Pepper의 앨범 중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은 앨범이다. 당시 70년대 포스트밥 재즈가 난립하던 시절에 자기복제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진가가 드러나기도 한다. Art Pepper 특유의 청량하고 깔끔한 색소폰 음색과 Elvin Jones의 드럼 연주가 인상적이다. 당시 그리 흥행하지 못한 탓에 중고 앨범이 생각보다 귀하다.
-프리재즈를 들을 용기가 생겼다면, Archie Shepp부터 시작해라. 괜히 알파벳 A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기기는 Apple, 프리재즈는 Archie Shepp. 비록, 알파벳을 운운하기에는 앨범 제목에서 오타를 내버렸지만 말이다. (malcom은 malcolm의 오타다.) 말콤 X 선생은 이런 일로 삐치실 소인배가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
 
위의 ‘한줄평’들은 이 공간을 찾는 ‘손님’을 향한 주인장의 말 걸기로 보입니다. 대화의 주제는 대체로 ‘이 음악 들어봤어?’ 또는 ‘이 음반은 좀 귀한 거야’ 또는 ‘이 뮤지션 대단하지 않아?’ 같은 거지요. 짐작건대 주인장은 이 말을 건네기 위해 아카이빙 과정에서 다시금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걸고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을 듯합니다.

주인장은 간혹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한 ‘혼잣말’도 남기고 있습니다.
 
(Poem for malcom - Archie Shepp). 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뭣도 모르던 중학생 시절, 나는 호기롭게 "재즈 좀 추천해주세요!" 라고 주문했고, 레코드 가게 사장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이 앨범을 추천했다. 당시 나는 이 앨범을 카세트 테이프로 구입했고, 한 번 듣고 집어던졌다. 이런 걸 음악이라고...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과거의 내 자신을 매우 치며, 해당 앨범을 Vinyl로 구입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무슨 탓인지 국내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결국 그를 만난 곳은 도쿄 시부야 디스크 유니온!
 
-존경하는 엡마(aepmar)께서 하사해주신 선물이다. aepmar선생도 A로 시작한다. Archie Shepp을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이건 뇌피셜이 아니라 진짜 엡마피셜.
 
-ock Steady의 상징, 빨간색과 검정색으로 앨범 커버를 디자인했다. 앨범 커버를 기획할 당시에 메인 컬러를 레드와 블랙으로 정하고 의상도 맞춰 입었단 이야기.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지만, 앨범 커버 아트라는 개념이 생긴 지 그리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는 점을 상기하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의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이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얼마나 뿌듯함을 느꼈을까. 무엇보다 빨간색 셔츠가 멋있다. 아무나 소화 못하는데 부럽다.

 
이런 ‘혼잣말’은 앨범에 관한 추억이나 사연을 기억해두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아카이빙 작업 과정에서 앨범에 얽힌 옛 기억이 떠올랐을 테고, 그 기억들이 날아가 버리거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되기 전에 앨범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이 바이닐> 아카이브를 보니 수집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디지털 아카이브란 자신의 소장품을 기록해두는 것 외에 그에 얽힌 자기만의 추억을 모아두는 공간이자 타인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유용할 것 같습니다. <마이 바이닐> 구성에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방]이 추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여행에 진심인 기록자의 사유 공간:

KMK's JOURNEY 아카이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공간의 주인장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록물을 둘러보면 그는 주로 여행지의 역사적 인물 동상, 건축물, 박물관 등을 찾아가는 여행을 즐기고 있습니다. 소개되어 있는 기록물이 대부분 사진류인 것을 보면 여행의 기념품 따위를 ‘소유’하기보다는 ‘보고 느끼고 배우는’ 취향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사진 속 피사체들은 하나같이 배경이 아닌 어엿한 주인공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로 보아 여행에 대한 주인장의 진지한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아카이브의 대문글에서도 그러한 태도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여행은 단순한 여흥과 휴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복잡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있죠. KMK's Journey는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세계와 마주하고자 한 K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K는 역사 속 무대를 밟기 위한 답사를 떠나기도 했으며,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위해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갈 용기를 얻고자 나아간 장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삶이 아닐까요?
 
주인장은 여행이 단순한 휴식을 넘어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는 이야기 끝에 “이런 것이 삶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싶은 심정입니다. 역사 속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고 하니, 주인장 말마따나 그것이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Goodbye, Dippy. 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아카이브로 이동합니다.

[K의 여행 보고서]에 포스팅한 ‘보고서’를 읽어보면 이 아카이브가 여행을 통해 역사와 세계를 사유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행에서 만난 인상적인 피사체를 사진에 담고 그에 관련한 배경지식을 조사하여 소개한 뒤 자신의 감상을 덧붙인 기행문 형식의 글들입니다.
 
나는 런던에 있을 때,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이동 수단보다 도보로 이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다른 나라의 도시는 어떤 느낌일지 몸소 체험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길 곳곳에 있는 이 나라의 상징과 기념물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런던은 거리마다 기념물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념비는 대체로 정치인과 군인을 위해 많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대화재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역사적인 인물들의 경우 생소하고 낯선 인물도 있었지만,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역사를 기억하는 법 I>)
 
우리가 도도의 모습과 생태를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섬에 상륙한 몇몇 항해자들이 남긴 기록 덕분이다. 실력 좋은 삽화가들은 도도의 세밀화를 그려 유럽에 전파했다. 하지만 일부 상충되는 목격담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 도도의 모습과 생태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영국 옥스퍼드의 애시몰린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던 마지막 도도의 박제는, 1755년 표본상태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모닥불에 던져졌다. 누군가 급하게 표본을 불 속에서 꺼냈으나, 이미 다리와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유실되었다. 도도는 골격과 목격담, 일부 기록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라푸스 쿠쿨라투스를 아십니까?>)
 
2012년에 디피는 그 자리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린 시절 책과 영상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스무 해를 살면서 가장 기다려왔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영국을 떠나기 하루 전, 나는 다시 디피를 보러 박물관을 찾았다. 다시 방문할 그 날을 위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글을 접하니 여행과 글쓰기에 전념하는 여행작가의 향기마저 느끼게 됩니다. 물론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여행을 소재로 한 다수의 개인 콘텐츠가 공유되고 있습니다만, [K의 여행 보고서]는 아카이브라는 체계적인 분류 기반을 활용하고 있다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예컨대 영국의 다양한 기념물들을 소개하고 있는 [영국사 이야기: 역사를 기억하는 법 I]에는 주제·시대·출처별로 정리되어 있는 분류 시스템을 기반으로 각각의 소재지, 건립연도와 시기 등이 참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글을 쓰는 기록자가 언덕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는 듯한 시선과 생각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취미 아카이브의 향연을 기다리며

이로써 음반 수집과 여행이라는 취미 활동의 결과물을 모은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경해보니 아카이브가 어떻게 활용 가능한지 윤곽이 잡히는 듯합니다. 자신의 취미 활동을 분석적으로 즐길 수도 있을 테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는 디지털 사랑방이 되기에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좀더 다양한 취미 아카이브가 탄생한다면 장차 취미를 주제로 한 전시회, 행사, 포럼 등의 향연이 펼쳐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아래 로고를 클릭해서 아카이브를 방문하세요.

 
my vinyl 아카이브
 
KMK'S JOURNEY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