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데이터로만 저장되어 있던 기록이 서로 연결점을 갖게 되면 새로운 의미와 지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키비스트의 발견>은 여러 아카이브에서 공개하는 기록과 콘텐츠를 살펴보면서 발견한 연결점을
새로운 맥락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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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아카이브는 정확한 이름표를 달고 축적된 기록물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록물을 활용하는 방식은 상황에 따라 다양해서, 단일한 아카이브 안에서 단일한 정보를 구할 때도 있지만 하나의 주제 아래 여러 아카이브를 살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다양한 관점에 접근하여 입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록물들 사이에 놓인 연결고리를 통해 미처 몰랐거나 잊혀 있던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2000년대 한국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호주제 폐지의 과정도 그러한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을 듯합니다.
노회찬 아카이브와 한국여성단체연합 기록물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아카이브 기록물들을 함께 살펴보면 어떤 이야기에 가 닿을지 확인해보겠습니다. /
노회찬과 시민단체의 연결고리
노회찬 의원은 호주제 폐지를 담은 민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새로운 신분등록제 법안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노회찬 아카이브에서 ‘호주제’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2003~2007년까지 11개의 기록물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호주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 온 한국여성단체연합 홈페이지에는 호주제에 관한 65개의 기록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 500개 시민단체 연대조직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아카이브에도 호주제 폐지 성명서가 있습니다. 이들 기록물에 나타난 정황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0. 9/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를 발족하여 호주제 폐지 국회 청원을 시작하다.
2003. 2/새로 들어서는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 호주제 폐지 법안을 국정과제로 채택하다.
2003. 11. 19/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헌법재판소의 공개 변론을 하루 앞두고 성명서를 발표하다.
2003. 11. 19~12. 15/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 올해 안에 꼬옥 통과시키기 국회 앞 1인 시위’에 나서다.
2004. 9. 14/국회의원 노회찬,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을 자신의 1호 법안으로 대표발의하다.
2005. 3. 2/민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다.
이 기록물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2003년 11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그 회원단체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국회 앞 1인 릴레이 시위에 나섰고, 바통을 이어받은 노회찬 의원이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사실입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발표한 성명서에는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 호주와 가족구성원을 구분지어 서열화하는 호주제도는 헌법에 보장된 모든 인간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므로 폐지해야 한다. 둘째, 호주제는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아니라 일제가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강제로 이식한 제도이므로 폐지해야 한다. 셋째, 남성 우선의 호주승계제도, 부가입적제도를 골자로 하는 호주제도는 평등한 가족관계를 저해하는 제도이므로 폐지해야 한다. 넷째, 부성강제주의를 폐지하고, 자녀의 성은 부의 성을 따르되 부모의 합의에 의해 모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고, 자녀의 행복추구권을 위해 예외적으로 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호주제 폐지는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족공동체를 반영하고 다양한 가족을 수용하는 제도이므로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
이듬해 3월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자 노회찬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혔습니다.
“2005년 3월 2일 오후 5시 32분! 한 세기 동안 여성에게 억압과 굴종의 굴레가 되어왔던 호주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늘은 기쁜 날! 역사는 제17대 8차 본회의를 그렇게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2005년 4월 8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호주제 폐지에 공헌한 노회찬 의원에게 감사패를 수여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호주제 폐지라는 숙원 과제를 풀기 위해 노회찬 의원과 사회시민단체 사이에 긴밀한 교류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호주제 폐지 이후 ‘연대’의 기록들
노회찬 아카이브에는 호주제 폐지 이후의 후속 활동을 보여주는 보도자료들이 있습니다. 이 기록물들은 호주제 폐지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여성의 권리를 보호할 새로운 신분제도를 제정하는 더 중요한 과제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법안 마련에서 법안 통과까지 2년의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5. 4. 13/노회찬 의원, 호적제도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는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의 사례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대안으로 ‘목적별 신분등록제도’를 모색하다.
2005. 9. 21/노회찬 의원, 출생·혼인·사망 등의 신고와 증명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 발의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발표하다.
2007. 4. 11/노회찬 의원, 이경숙 의원,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함께 국회는 새로운 호적법 대체입법을 신속히 처리하여 호주제 폐지를 완성하라는 기자회견을 열다.
2007. 4. 27/국회 본회의,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키다.
이 기록 ‘사이’의 연결고리 또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노회찬 의원과 시민사회단체가 전격적인 공동행동, 즉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노회찬 의원은 새 신분법을 만들기 위해 호주제로 인한 피해 사례를 청취하고 나서 5개월 후에 대체 법률안을 입법 발의했으며, 1년 반이 넘도록 법안이 통과되지 않자 시민단체와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법안 통과를 촉구했습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었고 2008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신분법이 시행됨으로써 비로소 호주제 폐지가 완성되었습니다.
노회찬의 장미
호주제 폐지의 핵심은 여성 차별을 없애고 양성 평등을 회복하는 데 있기 때문에 관련 기록물 ‘사이’에는 늘 여성이라는 연결고리가 따릅니다. 노회찬 아카이브의 호주제 관련 기록을 보면 호주제 대체 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노회찬 의원은 여성 차별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남성으로서 ‘다짐과 반성’의 마음을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2005. 3. 8/노회찬 의원, 호주제 폐지 이후 첫 번째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장미꽃을 전달하다.
2007. 8. 10/노회찬 중앙여성선거대책본부,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 의원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다.
2019. 3. 6/정의당 여성 당원들, 고 노회찬에게 장미헌정패를 바치다.
이 기록들은 노회찬 의원의 페미니스트다운 면모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2005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노회찬 의원은 동료 의원들과 여성 기자들에게 장미꽃을 보내면서 “3월 8일을 명절처럼 보내는 세계 각국의 관례대로 축하와 다짐과 반성의 마음을 담아 장미꽃 한 송이를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했습니다. 이후 그의 장미꽃 선물은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선 그를 지지하는 ‘언니 부대’가 결성되었을 때도 그는 여성 지지자들에게 장미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2019년 고인이 된 후 맞이한 세계여성의 날에는 정의당 여성 당원들로부터 장미꽃이 수놓인 헌정패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아카이브에서 호주제 폐지에 관한 기록을 찾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보니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확인되고 시민사회단체, 노회찬, 여성, 그리고 노회찬의 장미로 이어지는 한 편의 이야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분야와 관점으로 호주제를 다룬 기록들이 더해진다면 그 서사는 더욱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나아가겠지요. 그러고 보면 디지털 세계에 흩어져 있는 낱낱의 기록들을 순서대로 살펴보고 그 ‘사이’의 알고리즘을 찾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아날로그적인 활동입니다. 앞으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얼마나 많은 발견이 전개될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