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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 야전병원장, 문애현 수녀


폐허가 된 타국 땅에 온 23세 여성

“환자는 매일 2,000명씩 몰려드는데, 약도 병상도 늘 부족했어요. 그 환자들을 다 봐줄 수 없었던 게 아직도 마음 아파요.”
진 메리 말로니(Jean Marie Maloney), 세례명은 요안나. 한국에서 70년 세월을 보낸 이 미국인 수녀님의 한국 이름은 문애현입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4명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 땅을 밟은 그는 피난민만 100만 명이던 도시, 부산의 메리놀 병원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23세의 여성이 말도 전혀 모르는 타국에서, 전쟁의 폐허와 아픈 사람들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문애현 수녀님은 3년 후인 1956년 충북 증평의 병원으로 가서 일하다가 1963년, 공장지대인 인천 강화도로 갑니다. 그곳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를 통해 노동 문제에 눈을 뜨고, 서울 가리봉동으로 가서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합니다. 이후 잠시 미국 본원 수련소에 갔다가 1980년 부산으로 돌아온 문 수녀님은, 1985년 아시아수녀장상연합회 현장 체험 프로그램에서 ‘막달레나의 집’을 만납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돌봐준 친구

막달레나의 집에 오신 이유에 대해, 문애현 수녀님은 “그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옥정 대표은 “성매매 여성들이 수녀님께 음식을 종종 권했는데, 수녀님은 미안한 마음에 사양하곤 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가 몸 파는 여자라 더러워서 안 먹는구나’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이옥정 대표는 수녀님께, “주는 건 받으시고, 다른 걸로 보답해주셔라”고 조언해드렸어요. 수녀님은 기쁘게 받는 것, 함께 먹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람들과 가까워졌습니다.
두 사람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요셉의원, 도티병원, 성가복지병원 등 천주교 재단 병원에 데려가 무료 진료를 받게 해줍니다. 이옥정 대표는 “죽는 사람도 참 많던 시절”이라고 회상했습니다. “병으로 죽기도 하고, 자살도 흔했어요. 사람들이 시체를 꺼리니, 저와 수녀님이 장례를 치렀어요. 우리는 벽제화장터 단골이 되고, 장례전문가가 됐어요.” 

 

이옥정 대표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다

성매매 여성들은 의료보험증만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호적도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신분증도 없었지요. 신분증이 없으니 보험 가입도, 선거도, 취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성매매를 그만둘 수 없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브로커를 통해 신분증을 만들려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옥정 대표와 문애현 수녀님은 호적을 찾아주고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수녀님은 “주민등록증을 받은 사람들이 생애 첫 투표를 할 때, 기뻐하던 모습이 선하다”라며 회상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임대아파트 분양 받는 법도 알려줬습니다. 성매매에서 벗어나려면, 신분증 외에도 주거공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양에 성공해 보금자리를 얻은 이들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두 사람은 식탁 선물로, 담당 신부님은 축성식으로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축복했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가장 힘들었을 때는, 수녀님이 떠났을 때였다”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이 대표와 문 수녀님을 '환상의 콤비'라고 불렀습니다.

 


참고
2018년 10월 30일, 가톨릭프레스, “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거예요”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자 이옥정 전 대표, 문애현 수녀 인터뷰
2015년 7월 21일, 한국일보, 성매매 여성들 괴로움ㆍ외로움 30년간 보듬어 준 큰언니들
2023년 8월 25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국에서의 70년은 사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