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신기촌 사람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고 그랬던 동네”_김남순
양지원
게시일 2021.11.02  | 최종수정일 2022.08.25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고 그랬던 동네



구술자 : 김남순 (주안7동 통장자율회장, 신기촌 일대 51년 거주)
 

- 채록일 : 2018년 11월 11일
- 채록장소 : 카페 루앤비 구월점
- 채록자 : 조영숙, 이경희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60대 후반이요.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세요?
건축이요.


통장자율회장님이시라고 하더라구요. 태어나신 곳이 어디세요?
이북. 황해도 장현군.


그럼 혼자 내려오신 건가요?
아니요. 부모님 등에 업혀왔죠. 저희 엄마도 이북이 고향인데 혼자 내려오셨어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돌아가셨어요. 지금 살아계시면 86세 되세요. 


그럼 여기는 아기때 오셔가지고 계속 사신 거예요?
아니요. 전라도에서 살았어요. 16세까지 살다가 인천에 왔죠.


혼자 오셨어요?
오기는 혼자 왔는데 형님이 먼저 여기에 와있어서 오게 됐어요.


형님이 먼저 정착하셔서 여기로 오시게 된 거네요.
네. 형님이 먼저 정착하셔서.


여기가 살기 괜찮은 데니깐 오라고 하셨겠죠?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니깐 기술배우라고 올라오라고 한 거죠.


어떤 기술 배우셨어요?
목수요.


혹시 대성목재 오신건가요?
아니요. 거기 대성목재는 주로 합판 같은 거 만드는 곳이고 저 같은 경우에는 장롱 짜는 데였어요.


그럼 장롱 쪽 일을 하시다가 건축 일을 하신 거네요.
네.


통장 자율 회장님은 언제부터 하시게 됐나요?
3년 됐어요. 통장직은 15년.


오래하셨네요. 이 동에서만 하신건가요?
네. 이 동네에서만 51년 됐어요.


이 동네에 사신지가 51년이요?
네. 터줏대감이죠.


여기가 주안동이죠.
네. 주안7동.


그럼 겪으신 일들이 많으시겠어요. 동네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많이 변했죠. 옛날에는 여기가 철거민 촌이었어요. 만석동, 송현동 이런데서 철거해서 넘어온 철거민 촌이었죠. 완전 시골이었죠. 그때는 다 밭이었고. 중국 사람들이 전답을 했었죠. 밭, 논이요. 그래서 말 그대로 여기가 신기촌.


신기촌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좀 아세요?
신기촌이라는데가 원래 저기가 승기천이거든요. 의료보험 공단 앞으로. 그게 승기천이었어요. 그걸 따서 신기촌이라고 이름을 지어놨지요.


공단 앞거리가요?
네. 그게 냇가가 없고 수로 공사를 해서 지금 물이 연수동 남동공단으로 흐르고 있죠. 그러다가 여기가 주안2 서부동으로 발탁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주안3동으로 됐다가 여기서 분동으로 돼서 주안7동이 됐고 그래서 현재 주안7동이 된 거에요.


거주하시는 데는 어디세요?
여기 건물 옆이에요.


여기에서만 거주하신건가요?
아니요. 여기에서만이 아니라 거의 이 동네에서만 했죠. 그 동안에 서울 종암동에서 1년 정도 살았고, 또 그 안에 시골에서도 목수일 배우느라 1년 반 정도 살았었어요. 그때 빼고는 거의 이 동네에서만 살았죠.


그럼 서울이랑 시골에서 사신 거는 별로 큰 의미는 없으신 거네요. 거의 여기에서만 사셨으니깐.
그쵸. 태어나서 여기를 제일 많이 살았죠.


고향이나 마찬가지시네요.
그렇죠. 고향이나 마찬가지죠.


여기서 사시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특별한 일 같은 거 없으세요?
사건 같은 거야 많이 일어났지만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겠어요~ 말 그대로 여기가 철거민들이 오다 보니깐 하루에도 싸움이 10번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해가 지지 않았어요.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잖아요. 서로 잘났다고. 그때는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어요. 그러다가 세상이 좋아지고 파출소도 들어오고 동사무소도 들어오고 하다보니깐 체계적으로 질서가 잡힌 거죠.


이런 질서가 잡힌 지는 얼마나 됐어요?
질서가 잡힌 지는 78~9년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이었죠. 10월26일. 그때 쯤 일거에요. 그러다가 전두환 대통령이 강력하게 군법을 사용하면서 더 꽉 잡히게 됐지.


그때부터 도로 정비 같은 것도 된 건가요?
도로는 이렇게 안 돼 있고. 20년 전 95년도부터 여기가 주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10평, 20평 루핑이나 슬레이트집으로 돼있었어요.


루핑은 뭐에요?
루핑은 이런 종이. 그러니깐 누런 시멘트봉지 양쪽으로 기름을 먹여서 썼던 종이. 비가 안 새잖아요. 기름이 양쪽으로 있으니깐. 그런걸로 지붕을 해서 살았었어요. 그리고 좋은 집이라는 것은 기와집. 그러다가 97년도부터 여기가 환경개선 지구가 돼서 10평, 20평짜리 집들이 전부 재건축이 돼버렸어요. 여기는 90%이상. 요즘 건폐율이 60%잖아요. 100평이면 60평 짓는데 그때는 99%까지 지을 수가 있었어요. 옆집하고 합의하에 담도 같이 붙였었어요. 그렇게 해서 안에서 나누고. 97년도에 그것이 환경개선 지구로 돼서 주차장없이. 그래서 이 동네에 주차장이 없잖아요. 그러면서 골목도 조금씩 띠면서 이면도로가 생기고. 소방서 차는 골목에 못 들어가요. 딱딱 끊어지기만 했지 지금도 소방차는 못 들어가요. 리어카로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길로 나눠서 재건축이 되다보니깐. 그때로 치면 지금은 명동거리지 여기가.(웃음)


새로 건축 했을때는 진짜 좋았겠네요.
아니 지금 했으니깐 좋았다는 얘기죠. 그전에는 루핑집이고 도로가 포장이 안 됐었잖아요. 그래서 여기가 좀 속된말로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고 그랬던 동네가 이 동네에요. 그리고 버스를 타러 갈려면 5번 버스가 저 밑에가 종점이었어요. 지금 신한은행 앞에. 거기에 뭐가 있었냐면 화장터가 있었어요. 그런 동네였어요. 여기가. 근데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명동거리다 이거지.


그때에 비하면.
그 정도로 좋아진 거죠. 한마디로 하면 여기가 서민촌이예요. 그래서 전부 빌라가 들어와서 빌라촌인데 원룸, 투룸 이런 식이에요.


지금도 원룸, 투룸이에요?
네. 많죠. 10평짜리를 8~9평으로 지었으니깐 그게 얼마나 크겠어요? 계단 빼고 뭐 빼고 하면. 그래서 원룸이나 투룸. 그래도 자기 집이니깐 지어서 사는 거죠 편하게. 그리고 20평 가진 사람들은 좀 널찍하게 지었고.


그때 사셨던 분들은?
많이 나갔죠. 연수동쪽으로 나가고. 지금은 젊은 어려운 세대들이 많죠. 지금은 빌라 같은 데가 500/35, 300/35. 좀 큰 데는 500/40선이에요. 다 삯월세로.


지금도 어려운 분들이 많으신 거죠?
많죠. 우리 통만 해도 20가구 정도가 수급가정이에요. 우리 주안7동에 수급자가 560명 정도 됩니다. 지금 주안7동에 인구가 15,500명 정도가 되거든요. 70세 이상이 14,000명이고.


그럼 대부분이 70세 이상 이시라는 거네요.
네. 맞죠.


그럼 70대 이상이 거의 90%네요.
10분의1이죠. 1,400명이니깐.


15,000명 중에서 10분의 1이 70세 이상 이네요.
이번에 경로잔치를 했는데 그때도 75세까지로 짤랐어요. 많아서. 우리는 구에서 550만원 지원을 받았는데 그거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해서 국수 대접을 했어요. 해마다 해왔어요. 미디어축제도 참여하고. 원래 주관은 자치위원회인데 일은 통장들이 다합니다. 자치위원회에서 일할 사람이 없어요. 이번에 27, 28일에 어려운 가정들 김장하기를 해요. 근데 주관만 자치위원이고 일은 통장자리에서 다하고. 제가 회장이고 부회장분이 모든 일을 맡아서 하는데 여자고. 통장 분들이 3분의2는 여자 분들이고 남자 분은 1분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번에 여자 분들이 수고를 많이 하고…….


좋은 일 많이 하시네요.
저도 올해 12월 되면 통장도 그만두고 방제단장도 그만두고 자치위원도 그만두고 다 그만두려고요.


왜 그만두세요?
이제 힘들어요. 지금 현재 67세인데 그만해야죠. 내 일도 해야 하고. 마땅히 할 사람이 없다고 동장님은 회장을 1년만 더 봐달라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사는 지역에 애착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없죠. 전혀 없어요. 어젯밤에도 밤10시 넘어서 교회가 끝났는데 밤에도 쓸고 아침에도 낙엽을 쓸었는데 그 사이에 또 낙엽이 다 떨어졌어요. 내가 열심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또 쓸 때가 됐는데. 어제 같이 올라오던 아줌마한테 “이 동네 사람들은 빗자루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라는 소리를 했어요. 그냥 빗자루 한 번을 쓸지를 않으니깐. 그 사람들은 쓸지도 않는데 빗자루를 사겠어요?


자기 집 앞도 안 쓸어요?
그럼요. 눈이 와도 안 쓸어요. 그래서 작년에는 저기 골목에 사는 사람하고 한참 입씨름을 했어요. 왜 통장이 자기네 집 앞을 안 쓸어주냐고. 그래서 “통장이 남의 집 앞에 눈 치워주는 사람이 통장이야? 내가 방제 단장이고 하니깐 아침에 출·퇴근 시간에 위험한 도로는 염화칼슘을 다 뿌리고 있다. 근데 당신 집 앞은 당신이 쓸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그 집 마나님을 내가 반장을 시켜놨어. 그랬더니 꼼짝을 못해.(웃음) 그런 일도 있어요.


그분 일 열심히 하세요?
요즘은 반장을 시키면 일을 안 해요. 그래서 통장들이 일을 다 해야 되요.


보통 한 통에 몇 가구에요?
우리세대가 270세대거든요. 많은 데는 320세대, 350세대. 적은 데는 160세대 정도 되요. 저도 우리세대가 370세대에서 너무 많아서 분통이 됐어요. 15,16통으로. 여기는 16통 이구요. 이번에 여름에 저기 아파트에서 은행잎을 팔았어요. 그래서 가지를 짤라서 은행잎이 줄었는데 보통 가을에 50~100자루를 쓸어 담아야 해요. 40kg짜리를. 그걸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다해요. 그리고 많이 나오는 거는 동에서 치워버리는데 조금 나온 건 50L짜리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리고 버리고 해요. 누구랑 쓸어라 말어라 하면서 싸울 필요도 없고 제일 편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담배꽁초, 낙엽. 이게 내년 봄까지 가요. 어째 내년 봄까지 가냐 하면 저런 담장 위에 걸터 있던 낙엽들이 바람이 불면 또 날아가요. 그럼 계속 쓸어야지. 어떤 사람은 낙엽놔두라고 괜찮다고 하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빗자루 질도 안하고 산다고 얘기할 텐데 그러기 전에 치우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원래 제 습관이 그런 거 보고는 가만히 있지 않으니깐.


이 후에는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일 텐데.
만약에 제가 이사를 가게 되면 여기가 문제가 생길 것 같긴 해요. 여기 뿐 아니라 모든 동네가 다 그래요. 그래도 동네마다 쓰는 사람들이 한명씩은 있더라구요. 그러니깐 사는 거지 너나나나 방치해두면 되겠어요?


아까 은행잎을 판다고 하셨는데 그게 판매에요?
제약회사에서 사간대요.


동사무소에서 수거해서요?
아니요. 동사무소가 아니라 아파트에서 파는 거예요.


어디 아파트요?
우진아파트요.


다른데서는 안하죠?
다른 아파트는 모르겠는데 시골지역에는 집이나 뜰 안에 은행나무 큰 것들 있잖아요. 그걸 다 사가요. 거의 제약회사가 사간대요. 화장품회사, 제약회사 이런데서.


한 포대에 얼마에요?
그건 모르겠어요. 그냥 팔고 사는 것만 봐서. 팔면 그 사람들이 와서 다 채취해가요. 근데 뭐 얼마나 주겠어요?


자녀분들도 있으세요?
네. 2남.


아까 본 학생은…….
그건 우리 6촌 손자. 동생네 손자에요. 나하고는 5촌간이죠. 내가 5촌 할아버지에요. 요 밑에 사는데 우리손자하고 1살 차인데 쟤는 5학년이고 우리손자는 4학년. 단짝이에요. 그래서 저 둘은 6촌 지간인데 멀리 살면 누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얘네는 가깝게 주일마다 만나니깐 교회도 같이 다니고 다정하게 잘 지내요.


좋네요. 그런 것도 다들 여기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가능한거겠죠?
그렇죠. 어디가도 우리 형제지간에 우애는 자랑하고 싶어요. 우리가 7남매인데 어머니가 4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여든일곱에. 아버님은 여든셋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자손이 62명이에요.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증손자 19명을 두고 돌아가셨어요. 아버님 살아계실 때부터 형제간의 모든 우애는 제가 담당하고. 아버님이 명령을 내리면 형님이랑 누님한테 보고만 하고, 모든 일은 제가 다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버님하고 신뢰관계가 깊어서 둘째아들인데도 모든 유산을 나한테 물려주고 돌아가셨어요. 팔 때는 4형제가 똑같이 나눠가지라고 하셨고. 시골에 땅이 5,000평정도 있는데 좀 있음 거기로 가려고 집터도 다 봐두고 다듬어 놨어요.


시골이 어디에요?
전남 무안. 무안 공항 그쪽이에요.


그럼 여기서 오래 살다 내려가시면 아쉬울 것 같아요.
거기 집 마당에서 바닷가가 50미터밖에 안돼서 공기 좋고 인심좋고 너무 좋으니깐 가려는 거죠. 또 누님이 거기 계시니깐. 


그럼 마을 변천사가 70년대에 파출소랑 동사무소 들어오고..
정확히는 기억을 못하는데 73~4년도에 주안2 서부동이라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후로 파출소가 들어오고 했죠.


6,70년대 기억나세요?
다른 건 기억에 없고 70년대에 내가 처음 올라오니깐 여기 수도가 공동수도가 2개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초롱 알죠? 함석으로 만든 물동이. 그 물동이로 2개. 지고 다니는 거 있잖아요. 그게 3원이었어요. 한 지게, 두 통에 3원. 한통엔 1원 50전. 그래서 길러다 먹었어요. 여기에 우물이 하나 있었고. 


물을 사다 드신 거네요.
그렇죠. 물을 사 마신 거죠. 연탄 때고. 그리고 최고 화력은 석유곤로. 밥 같은 거 하려고 연탄불에 얹어놓고 왔다가 물 받으러 왔다 늦으면 밥이 다 타요. 그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밥을 올려놓고 밥 되는 동안 물 길러 다녀오고 그랬던 거네요.
네. 초롱이 쫙 밀려있으니깐 늦은 적이 많았어요. 순서대로 줄서있으니깐.


몇 명 정도 기다렸어요?
많이 기다리면 4-50명 기다리죠. 그리고 낮에 안 밀릴 때는 몇 명씩 있고.


그럼 물을 파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공동 수도로 허가를 내서 팔게 해 놓은 거죠.


관리인이 팔아요?
그렇죠. 집이었는데 여기 그런 집이 2개 있었던 거죠. 수도국에서놔 준거죠.


그러니깐 한 집에다가 수도를 만들어 놓고 그 집 주인이 관리를 하는거에요?
네. 그렇죠.


그럼 그 돈들은 주인이 가져요?
그거 까지는 모르겠어요. 수도요금 내고 그거는 자기들이 가졌겠죠.


그때는 보일러도 연탄보일러 였어요?
그렇죠. 거의 연탄보일러였어요. 85~6년 까지도 불 때는 아궁이가 있었어요.


재건축이 안됐던 집들이 아궁이가 있었다는 거죠? 10평집 이런집들이.
네. 그때 당시는 재개발이 안 들어왔으니깐. 나무 사다 때고, 주어다 때고 그랬죠. 굉장히 어려울 때였죠.


이게 정비가 되고 체계가 잡히고 나서도 큰 변화는 없었죠?
그렇죠. 그렇게 큰 변화는 없고…….


그 상태에서 조금씩 변화가 있었던 거였네요.
네. 집이 조금씩 지어지면서 간이주차장도 조그맣게 3군데 생기고. 간이 공원도 3군데 생겼어요.


주민들 사이에 단합 같은 건 잘되는 편인가요?
그 전에 초기에는 많이 안 좋았죠. 이게 뭐 시골처럼 집성촌도 아니고 각지에서 모인 서민들이 살았기 때문에 술 먹고 싸우고 그런 식이었죠. 그러다가 먹고 살만해지니깐 그런 것 들이 사라지고 서로 이해하고 산거죠.


이 근처에 부평 이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여기가 거의 다 타(他)성이었어요. 거의 다타지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그때 처음에 왔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났고 몇 집 안 남았어요.


잘 돼서 떠나신 건가요?
잘 돼서 떠나고 잘 안돼서 떠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저 같은 경우는 직업이 그렇다 보니깐 얼른 못 떠나고. 80년도부터는 설비, 수리, 인테리어… 다 종합적으로 했어요. 이 건물도 97년도에 제가 지은 거예요. 그래서 얼른 못 떠나가고 자리 잡고 있는 거죠.


애정이 있으신가 봐요. 정이 있어서 그러 신거 아니에요?
정이 있긴 있지만 별로…….


그런 이 건물 주인이세요?
아니요. 주인은 이 건물 3층에 살아요. 우리 집은 저기 옆에고.


교회일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왜 그러 신거에요?
교회에서는 장로니깐. 아는 목사님하고 제가 처음에 개척을 해서, 처음에 같이 개척하신 목사님은 딴 데로 가시고 지금 이분은 제가 모시고 왔죠. 교회에서 장로는 저 혼자고 집사, 권사 그렇죠.


교회에도 일이 굉장히 많던데요.
많죠. 살림은 장로가하고. 교회 헌법에 보면 목사님과 장로는 직위는 같지만 사명이 틀린 거죠. 목사님은 복음전하고 세례주고. 장로는 교회 살림을 하고 교인들 지휘를 하고. 사명이 틀리지 직위는 같아요. 그래서 재정 같은 것도 책임지고 모든 걸 다 해야 해요. 


사시면서 힘들었던 부분이나 행복했던 부분도 있으시죠?
제일 힘들었던 때는 80년대에 제가 5살 먹은 큰딸을 하나 잃었어요. 지금 살아있었으면 43살인데.


사고였어요?
사고가 아니고 가을에 시골에 일 도와드리러 갔다가 오는 길에 기차에서 김밥을 사서 먹였었는데 그게 잘못됐었나 봐요. 저녁에 탈나가지고 병원에 데리고 가니깐 죽었다고 데리고 가라고 하더라구요. 지금 큰 아들이 40살 먹고 둘째가 38살 먹었는데. 그때는 정말 정신이 돌 정도로 제일 어려웠었죠. 생에 제일 힘들었을 때죠. 그리고 힘 안 드는 사람이 어딨었겠어요? 먹고 살려고 하면 다 힘들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생존경쟁이잖아요.


지금 같으면 구급차라도 부르는데 그때는 그게 없었으니깐.
그렇죠. 믿기지 않는 일이었죠. 저도 7살 때부터 형님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일찍 했어요. 그렇게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를) 잠깐 쉴 때. 80년대에 돈을 좀 버니깐 물질에 눈이 멀었었지. 그러다가 딸 하나 먼저 하나님이 데려가고 물질도 다 탕진해버리고. 그때에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어요. 


그래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거였네요. 좋았던 기억은 있으세요?
그렇게 크게 좋았다 하는 것은 없어요.


지금까지는 개인의 욕심보다는 대중을 위한 일들을 많이 하셨었는데 그거에 대해서는 보람이 많으시겠어요.
지금도 동에서 보라고 해서 통장을 맡고 있고 여러 가지 자생단체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는데 내가 만족할 정도로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건 없고. 다들 더하라고는 하는데…….


일단 직책을 맡는 거 자체가 누구라도 선뜻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제가 표창장 같은 게 50장 정도가 되요. 학교 다니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래서 내가 자녀들한테 많이 하는 이야기가 “니네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그런 상장 한 장이라도 받아 볼 수 있는 삶을 살아라.”라고 교훈을 하죠.


자녀분들이 그렇게 교훈 하시는 대로 잘 사시나요?
그렇게는 못 살아도 말썽 없이 잘 살아요.


이 마을 일을 하시면서 고쳐졌으면 하는 일이 있으신가요?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 것 같다 생각하시는 부분이요.
마을 일을 해오다 보면 동장들이 동의 일에 많이 협조를 하잖아요. 동사무소에 13명의 직원들은 잘 모르잖아요. 탁상행정이에요. 그러다 보니 동장들이 가서 보고하고 그러잖아요. 하다못해 쓰레기같은 거 치워 달라, 도로가 파손됐으니깐 고쳐 달라고도 하고. 이게 그때그때 이루어지면 좋은데 안 이루어진 다니깐요. 그러다 보면 통장들과 직원들 사이에도 조금 금이 가게 되고. 또 동장님 같은 경우에는 구청에서 발령받아서 온 분들이잖아요. 그러면 이분이 이 동네에서 살고 여기서 몇 년씩 있으면 동네에 애착감을 가지고 일을 할 텐데 여기 왔다 가면 그만이에요. 철새란 말이에요.


직업으로만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와서 1년, 어떤 사람은 6개월만에도 가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 왔다가 다시 구청으로 들어갔다가 시청으로 들어가고. 그렇기 때문에 신경 안 써요. 구나 시에서 내리는 명령만 하려고 하지 딴 건 잘 안 해요. 그래도 이번에 온 동장님은 예산도 타오고 내부수리도 하고 해서 많이 좋아졌죠. 그 전엔 예산 10원도 못 타오는 동장님도 있었고. 그리고 지금 동사무소가 협소해요. 40년이 넘어서. 그래서 그것 때문에 구의원, 국회의원, 시장한테 계속 보고하고 그러는데 대지가 마땅치 않고 예산이 모자라서 못하고 이러고 있죠. 지금 우리 동에서 보자면 동사무소 다시 건축하는 게 제일 시급하고. 거기에 많은 자생단체들 모임이나 프로그램들 라인댄스, 서예, 오카리나 이런 것들을 2층에서 하고 있는데 많이 좁아요. 동 직원들도 잘하는 사람들은 잘해요. 복지팀이 6명인데 거기서도 잘하는 사람은 잘하고 자기 일처럼 안하는 사람도 있고. 복지 팀에서도 불우이웃돌보러 현장에 나가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직접 보다보니깐 통장들하고 화합도 잘되고 그래요. 그래도 이번에 온 동장님은 열심히 하고 잘해요. 앞전에 있던 동장님은 10개월 있다가 다시 구청으로 복지과장으로 갔는데 그 분도 애 많이 쓰고 갔어요. 저하고 마음도 잘 맞았어요. 그러다 딱 가버리니깐 힘들더라구요. 임기가 짧아서 안 좋더라구요.


지금 계신 동장님이 임기가 더 길어지면 좋겠네요.
그럼 좋죠. 우리 동장님이 동 건축도 많이 협조해주고 있고. 근데 우선은 예산 때문에 시 협조가 필요하니깐. 우리 동장님이 구에서 예산 팀장으로 있다가 내려왔어요. 그래서 그런 걸 잘 알다 보니깐 이번에 예산을 타왔어요. 그래서 동이 좀 깨끗해지고 좋아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