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물길
“승기천이 원도심 안에 실제로 흐르고 있었어” _김윤식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4.26

승기천이 원도심 안에 
실제로 흐르고 있었어 


 




 

구술자 : 김윤식 (73, 1950~60년대 숭의동 거주) 
 
- 채록일 : 20191016() 오후 2, 1218() 오후 630
- 채록자 : 남희현
- 채록 장소 : 인천개항장연구소

 

 


고령 지방에 고령토만치는 아니어도 황토 흙이 좋았기
때문에 도자기 회사. 그리고 조그만 항아리 만드는 가마가
많았던 거야. 흙도 이기고 반죽하고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려면 틀림없이 물이 있었을 거야. 그물이 오늘날처럼
급수시설이 있으면 어디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잖아.
천연적으로 깨끗한 물이 와야겠지. 개천물같이 불순물이 있는
걸로 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맑은 물이 흘렀고, 흙이 좋았던
것을 추측하면 수봉산에서 물이 흘렀다는 증거는 되지.”

 

미추홀구에서 지내신 때가 언제셨나요?
본격적으로 산 건 55, 태어나긴 내동에서 태어났는데 돌아가신 내 아버지께서 자동차 사업을 하신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왜정 때부터 운전을 하셨다고. 상당히 개화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기있었지. 그래서 세상에선 안 알아줘도 우리 선친이 수줍어하시던 성격이랄까.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나대는 분이 못되셔서 크게 이름이 없네. 그치만 인천 운수업계에, 내 아버지를 추켜세우는 것 같지만 선구자 같은 분이셔요.
광복 후에 미군이 오잖아. 미국이 다시 철수했다가 6.25 때 다시 오지만 물자들이 많이 들어오잖아. 6.25 후에는 미군이 남한을 지켜야겠다 주둔하잖아. 숭의동 로타리부터 올림포스 앞 중부 경찰서까지 미국 하역부대인가 그래. 선박에서 물건이 들어오면 하역부대가 쭈욱 철망 쳐놓고 접근금지 써놓고 총 들고 지키고 서있다고. 앞에 창고가 몇 개 남기도 했지만 쭉 있었어.
미곡 창고고 주로 일제 때 지어진 건데 미국 들어오면서 미국 물자 창고가 되었지. 우선 인천항에서 들어온 걸 여기 뒀다가 부평 에스캄으로 갔다가 거기서 용산이고 평택이고, 파주로 의정부로 중부권으로 나눠 주는 게 인천항이었다고. 남쪽은 부산항구였고. 하여튼 운수업이 굉장했다고. 어려서 우리 차가, 트럭이 석 대가 있었는데 한국인 도와준다고 들어오는 보리, 강냉이(옥수수), . 이게 인천대한제분공장이 저기 있긴 하지만 요거 하나로 안되니 통밀을 서울로 실어간다고. 그러면 자동차 적재함에 저녁이면 빗자루로 쓸 정도로. 그러니까 그때 할머니가, 숭의동에는 집도 없을 때야. 우리 집 300평 땅을 가지고 차고지로 쓰고 밑에는 논밭이 있었는데 밀, 보리가 있으니 그걸로 닭을 기르는 거야. 닭을 백여 수를 길러서 달걀 나오면 그걸로 찜도 해 먹고 팔기도 하고생활 근거가 숭의동 308번지. 수봉산까지는 그래도 거리가 있지만, 서쪽. 인천 시내 쪽이지. 북동쪽이면 신기촌 자리고, 그쪽보다는 북서쪽인 제물포 쪽이 내 생활 근거란 말이야. 숭의초등학교 있고, 남중이 여기 있지.
내가  전학을  와서  여기서 졸업을 했다고. 원래는 축현을 다녔지. 308번지는 장안예식장 있는데. 축구 경기장, 광성, 도원역 있으니까 내가 있었던 곳이 이즈음 (숭의동308번지) 되겠어. 아무래도 와룡 양조장이나 저수지, 그 일대인 천시분뇨처리장 이런 것들이 있었던. 성애원인가 고아원이 있었고, 변전소가 있었고, 가죽공장이 있었고. 수봉공원에 나환자가 산다는 굴이 있었고. 내리교회 신자들 무덤이 그게 이제 김포 가는 데로 이사 갔어. 그리고 이제 6.25 이후에 수봉산 판잣집이 남녘에 수십 채가 들어섰어.
전도관 109번지도 비슷했어요. 반은 무덤이고 반은 판잣집이었다고. 지금은 거기가 평지가 되서 그런데 중국인 묘지가 있던 도화동 산언덕, 묘지 밑에 대지기라는 마을이 있었고. 여기는 나중에 고등학교 때, 우리 집이 폭삭 망해가지고 외딴 흉가집에서 외할머니하고 살았던 곳인데 이쪽은 수봉공원에서 흘러내리는, 와룡양조장이 있었어. 숭의초등학교 옆쪽에 와룡양조장이 있었고,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수영을 하고 스케이트를 했다고 하는데 이게 광복 후에 생긴 게 아니고 왜정 때 있었던 소주 공장이라구. 그때만 해도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있어서 철조망을 엄청 높이 쳤어. 그래서 그걸 뚫고 들어가서 수영을 하거나 스케이트를 하지는 못했을 거라구. 와룡공장에 소주도 만들고. 양조업이니까 아마 양조간장도 만들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공장에서 아주 뜨거운 물이 나와요.
금방 공정이 끝나고 나오는 물이니까. 겨울에도 안 얼었다고. 그리고 시커맸어. 그래서 우리들은 어렸을 때, 어른들은 소주 공장이라고 했고, 우리들은 간장 공장이라고 했어. 까만물이 나오니까. 내가 대학 들어간 60년대 중후반까지도, 70년대까지 있었나 잘 모르겠다만은 양조장 폐쇄된 때를 알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내가 66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68년까지 이 길을 다녔어. 그때까지도 꺼먼물이 흘렀고. 그리고 이내 69년 군대를 갔으니까. 갔다 오고 나서는 생활 근거가 거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건 먹고 살기 힘든데 와룡양조장에 물이 흘렀네 어쨌네 그런 데에 관심 둘리가 없잖아. 떠나서 구월동에서도 살고, 연수구에서 살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서울에서도 잠시 살았으니까. 기억은 안 나는데 분명한 것은 68년까지 양조장이 있었어. 그런데 그 저수지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어.
이쪽 수봉산이 내가 어려서 숭의학교로 다닐 때에는 와룡양조장 이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수봉산이라면, 숭의학교가 있고 논밭이 있었어. 수봉산 밑에 길(숭의초등학교와 그 옆 정화조를 끼고 돌아 가는 길)이 있는데 (그 맞은편 쪽으로)변전소가 있고, 가죽공장이 있었다면, 이 즈음(좀 더 위쪽으로)에 고아원이 있었고.  
 

숭의초등학교와 그 옆 정화조를 끼고 도는 것이 물길인가요
길인가요길이면서 물이 있었지. 물가에 길이 나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이 발원지는 어디인지 몰라. 그런데 물가 위쪽으로는 무덤이고, 그 옆으로 피난민들의 판잣집들이 이렇게 있고. 여기는 모두 무덤이야. 그러니까 무덤 위쪽이 인천 예총이야. 이게 바로 내리교회 묘지야. 이게 교회 묘지였어.
개천, 냇물이 그 근처까지 있었어. 장마가 지고 오면 이걸 잘 돌보지 않고 그러니까 장마가 지면 무덤이 무너지고 그러잖아. 그러면 해골바가지, 뼈다귀가 드러나기도 했다구.
내가 본 해골바가지들이 굉장히 즉어. 두개골이. 그걸 보니까 어린애 같아. 내가 국민학생인데도 나보다도 적은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물론 우리 머리는 가죽이 있고, 살이 붙어 있고 커 보이지만. 두개골 정수리에 앞부분, 뒷부분이 노란 아교, 톱니처럼 맞물려 있더라구. 경계선이 아교 녹인 것처럼 이음매가 보이더라구. 하여튼 이 물이 이 수봉산에서 발원한 거야. 해발 몇 미터이려나? 이 변전소 앞쪽에 주인선이 났다구. 숭의학교 옆문에서 나와서 산9번지로 가는 길이야.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고, 변전소 뒤쪽으로는 나무가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굴이 두 개가 있었는데 거기에나 환자들이 살았다고 해요
 

무서워서 근처에 못 갔겠어요
거기는 못 올라가지. 여름방학에는 곤충채집, 식물채집 하라고 그러지. 그럼 수봉산 숲에 가서. 그런데 숲이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게 아니라 몇 년생 안 되는 고런 정도야. 뒤는 빨간 산이야.
이 산을 넘어가면 인천기계공고가 있었어. 논밭에 변전소탑이 중간 중간에 서있는데 여기가 한때는 매립을 해가지고 시 종말처리장을 만들었어. 50년대 이때 푸세식 화장실 아니야? 우차, 소가 끄는 나무 탱크를 싣고. 그게 똥통이야. 이런 게 수십, 수백 대가 저녁이면 여기로 와요.
와룡양조장에 소주 만드는 데가 있고, 인천시의 모든 분뇨를 처리하는 곳도 여기 있었어. 큰 탱크가 두 개가 있었는데 축구장만하다고 해야 할까 엄청 컸다고. 여기에 퍼부으면 문을 열고 분뇨가 쏟아지고, 이게 꽉 차면 살짝 뭘 덮어. 썩히는 거야. 그럼 퇴비가 되는 거지. 얼마 지나면 발효가 되잖아? 세균도 죽고. 그러면 비료 하는 거야. 58년인가 인천일보를 보면 경기도 경찰국에 서 대로로 똥차 다니지 말아라. 대로 인근 몇 미터까지는 이제 화장실 푸세식, 이것도 새벽에 해라. 선진도시에서이런 이야기도 있었어. 그런데 이 물이 제법 흘렀어.
미꾸라지, 버들붕어 이런 걸 잡았다구. 우리가. 수봉산에 오염이 덜 되고, 이제 경인선이 가게 되는데 제물포역이 있고, 와룡양조장에서 폐수를 이리로 흘려버리면 제물포역 앞쪽으로 흘러서 쑥골 쪽 개천에 합류가 돼. 그럼 쑥골 앞으로 흐르는 그것이 숭의동으로 해서 낙섬 쪽으로, 숭의동 로타리. 지금 평양옥 옆으로 쭉 해서 옐로하우스로 빠져나간다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기억은 잘하는데 그림을 못 그리니까 정확하게 그려서 보여주면 좋을텐데. 그게 내가 어렸을 때, 어스름녘에 자주색 똥물을 쏟아내고 하는. 황혼 옆에 소를 끌고 와서 문을 열면 지하땡크로 분뇨로 물이 많아. 그게 자주색으로 보이더라구
 

그게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을까요?
몰라. 10, 20대 왕성하게 에너지가 넘쳐서 살 때는 이런 거에 관심이 없고, 사는 거, 술 마시고 노는 거에 관심이 가고 생각이 안 나고 그러다가 내 육신이 쇠락해지고, 열기가 없어지고 나니까 침착해지고, 내 삶에 대해 침잠해서 살게 되잖아.
내가 자다가 이게 꿈이었나 싶다가도 이게 몇 학년 때의 기억인데. 평상시에 생각이 안 나가도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그걸 보는데 어떤 선생이 너희들 거기서 뭐하냐?” 물으니까 똥물 봐요그럴 수도 없고. 내가 반장을 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청소 감독을 안하고 반장보고 하라고 해서 내가 매일 늦게 갔어.
누군지 생각은 안 나는데 걔가 커튼을 닫으려고 하다가 그 장면이 떠올라. 냄새는 안 나. 바닷가 쪽에서 육지 쪽으로 바람이 부니까 와룡양조장 쪽에선 났겠지만 내 쪽에선 안 났지. 그리고 시내에 살던 얘들 만나면, “숭의학교 너희들 똥통이래. 똥통 옆에 있으니까. ”냄새 난다고 해가지고 자존심 상했던 기억도 있고. 하여튼 수봉공원 뒤쪽이 그랬어요. 뒤쪽으로 물이 있었어.
신기촌 쪽으로는 개천같은, 선명한 개천이 수봉산에서 내려왔다고 얘기하는 개천은 기억이 나지 않아. 수원지가 어딘지 딱 잡을 수는 없지만 비 오면 스며들었다가, 나무 뿌리에 밑에 있다가 흘러나오는 물이지그런데 신기촌 쪽은 전부 판잣집이니까 개천과 여기(판잣집)서 나오는 물이 뒤섞여 있었다고 생각해. 원류가 그래도 한 폭은 되었어. 충분히 들어가서 미꾸라지 잡고, 버들붕어 잡고. 얘들 놀기좋았지. 밑에 모래고 맑았다구. 신기촌 쪽으로는 오지항아리 굽는 가마가 많았어.
내 친구 놈이, 국민학교 동창인데 걔네 집도 항아리를 구웠어. 항아리 굽는 그 친구 집에 겨울에 놀러 가면 그 가마, 항아리를 굽고 나면 천 몇 도가 넘는데 며칠 동안 안 식어. 흙으로 된 가마가. 거기 들어가면 엄동설한에도 후끈 후끈. 그런데 그 앞으로 물이 개천같이 흘렀다고. 그 물이 수봉산에서 흘러나온다고 생각은 못했어. 그런데 지금 추측하면 거기 흙이 좋았고, 한국유업 도자기공장이 신기촌에 있었잖아. 율목공원에 왜놈 묘지 있고, 숭의동 축구장 옆에 인천소방소가 있었고, 그 옆이 화장터고. 숭의동에 장티푸스 전염병 치료하는 덕생원이라 는 병원이 있었어. 그 지리가 중앙여상이 된 거야. 이 묘지가 신기촌으로 갔고. 거기가 흙이 좋았던 거야.
고령지방에 고령토만치는 아니어도 황토 흙이 좋았기 때문에 도자기 회사. 그리고 조그만 항아리 만드는 가마가 많았던 거야. 흙도 이기고 반죽하고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려면 틀림없이 물이 있었을 거야. 그 물이 오늘날처럼 급수시설이 있으면 어디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잖아. 천연적으로 깨끗한 물이 와야겠지. 개천 물같이 불순물 이 있는 걸로 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맑은 물이 흘렀고, 흙이 좋았던 것을 추측하면 수봉산에서 물이 흘렀다는 증거는 되지. 그렇지만 그 위치는 드문드문 가봤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 굉장히 그쪽이 분지 지역임에도 논밭이 많았다는 것은 수자원이 풍부했다는 증거지.
겨울에 고등학교 때 럭키아파트 있는, 능허대 앞이 말발굽 해안이 돌산 밑까지 있었다고. 해송이 몇 그루 늘어져 있고, 모래도 있고 잔잔하고 참 좋았어. 고등학생 때에는 주말마다 캠핑을 갔다고. 능허대 앞 모래사장에. 물 들어오고 길 건너 옥련성당이 있었고. 청량산 줄기에 마지막이야. 능허대가 볼록 솟고 그 앞에 섬이 있고. 남동구, 연수가가 다 남구였지. 지금 송도 고등학교 자리, 거기 터널이 되었는데 산이야. 인천 초창기에 젖소를 기르던 마을이 거기 있었다구. 인천 우유라고 있었어. 인천기계공고 맞은편에 인천 우유공장도 있었어.
그때만 해도 서울우유도 쎌 때가 아니야. 우유도 잘 못 먹고, 가난한 때라. 인천 우유공장에 우유를 대던 목장이었을 거야. 그걸 넘어가면 성황당이 있었고, 그걸 넘으면 능허대 백사장이 나오는 거야성황당에 돌 던지고, 그 옆에 당집이 있어요. 1225일에 거기서 놀다가 장작이 떨어져서 추우니까 그 집에 있다가 나오니까 먼지가. 혼자는 못가겠더라구. 얼마 전까지 주인선 철길 옆에 굉장히 오래된 중국집이 유명한 집 있었어. 60년대 초에 송도에 소풍 가고 오다가다 보고, 고등학교 때는 크리스마스 시내에서 놀다가 걸릴까봐 거기에 가기도 하고. 교통방송 맞은편에 흔적이 남기는 했는데. 신기촌도 가다보면 독정이 쪽에서 시청 쪽으로 간다면 오른쪽이 좀 고지였다고.
구릉지역인데 다 깎아서 도시를 만들었지만 주안 쪽도 상당히 구릉지였다고. 시민회관에서 주안역을 가려면 논밭으로 난 오솔길로 가야 하는데 적어도 10m 이상 고바위였다고. 평지보다는 그걸 넘어서 가려면 비 오는 날이면 장화 없으면 찔끄덕 거리고. 거기가 시골이었어. 주안역 그 뒤로 나가면 염전이잖아. 보통 가좌동 염전이라고 하는데가 다 거기서부터  재능대 뒤쪽으로, 동구 무슨 부속 가게 있던 곳이 염전이었거든. 염전이 엄청 컸어. 승기천이 원도심 안에 실제로 흐르고 있었어. 수봉산 신기촌 쪽에는 사람도 얼마 안 살고, 전부 논밭이었어. 6.25 이후에 판잣집이 다 들어서고. 경인고속도로 뚫리고, 신기촌 길 넓게 하면서 정리가 되었지. 삶이 얼마 안 사니 기억이 거기서 그칠 수 있는데 길 가다가 누군가 글을 하나 남기면 기특한 거지.  
 

초등학교 기억도 잘 안나는데 선생님처럼 한 장면의 그림으로 표현하시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래요.
지형에 논이 있고 하니까 논 옆으로 수로가 있잖아요. 이런 수로를 인위적으로 내니까 이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 물웅덩이가 있을 수도 있고 드문드문 있었으니까. 우리가 중학교 겨울에 스케이트를 거기서 배웠다고. 물이 풍부하니까 논에 겨울에도 건조하게 두지 않고 물을 넣어 놓은 논이 있어. 벼 벤 뿌리들이 완전히 갇히면 좋은데 툭툭 나오면 스케이트를 못하지
 

미추홀구는 선생님께 어떤 곳인가요?
내가 내동 8번지에서 태어났어. 태어나서 거기서 4,5살까지 살았는데. 그 기억을 이야기하면 내가 이야기할 수 있어. 47년생인데 50년이면 만 3살에 6.25가일어났어. 피난 가던 것도 상당 기억난다고. 배 타는데 널판 위로 올라가잖아.
내가 등에 업혀서 가는데 무섭다고 안 간다고 했던 기억도 나고. 날 업은 보모 아줌마가 잘 가는데도 거기가 천길 낭떠러지 같았다고. 배 타고 가는데 우리 어머니가 구토를 하시는데 우리형이 나보다 4살 위인데 이름이 정식이야. 어머니가 증식아~”그러지. “증식아, 증식아~ 깡통하는데 깡통을 갖고 가는데 이놈의 깡통을 쓰러뜨려서 이놈의 토사물이. 하여튼 이런 기억이. 충청도 서산으로 피난을 가서 모래사장에서 콩나물 줄거리 같은 걸, 그게 마라고 하더라구. 그걸 형하고 캐먹던 기억. 비행기 하나, 괴뢰군 한 명 못 봤어.
그리고 휴전 직전에 하늘로 불덩이들이 날아가고. 쌕쌕이 날아가면 할머니가 아구구구 책상 밑으로 숨던 거는 생각나. 아버지가 사업하시는 바람에 남구로 이사를 갔어. 남구 구민이 되었지. 숭의동하고 동인천이 아이 때는 멀었던 거야. 거의 안 오고 숭의 공설운동장이 있었는데 가난한 시절에 운동 시합이 참 많았어. 휴전 후에 운동장에서 시민 위안의  같은 게 엄청 많았다구. 그 당시 인천 출신 영화배우, 연극 배우, 가수들이 박재란, 현미, 한명숙, 도미, 이런 사람들이 와서 노래 부르고. 그런 행사가 많아서 동인천 사는 사람이 오히려 숭의동으로 놀러오는 거야.
새해 기념일, 3.1, 제헌절, 광복절, 정부에서 시키는 관제 대회 볼거리가 많았어. 전국 씨름 대회, 미녀가 죽느냐 멧돼지가 죽느냐 그래가지 고 공수도 5단짜리가 멧돼지하고 싸운다고 해서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훔쳐보는데 작은 돼지 새끼 하나를 뉘어놓고는 여자가 수도로 창자를 뚫는데 하다하다 돼지새끼가 도망가는데. (웃음)고등학교 때는 야구선수 장훈 선수도 보고 그랬다구
미식축구하는 것도 보고. 이사 가서 초등학교 졸업했지. 인천중학교를 붙었는데 서류를 내야 한대. 호적등본인지 예전엔 기류계4) 라고 했어.요즘으로 치면 주민등록, 어디 기류하느냐는 거지. 집에 가지고 갔더니 지금 남구청 (미추홀구청)에서 서쪽으로 장사래도서관그 부근쯤이 남부 출장소 자리야. 거길들 어가니 안경 끼고, 토시 낀 주사양반이 어떻게 왔냐고 물어. 숭의동 308번지인데 호적등본 띠러 왔다고 하니까 그때는 두꺼워. 100번지 단위로 했을 거야. 그 종이에 먹지를 깔고 용지 양식에다가 써 주는 거야.
이 양반이 이리 냉기(넘기), 저리 보고 하다가 네 아부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 하는 거야. “넌 호적에 없다. 네 형이 정식이 맞냐? 김정식은 있는데 넌 읎다. ”그래서 집으로 와서 할머니 나는 호적이 없대.” 막 우니까 전화를 해가지고 아버지를 찾아서 얘가 호적에 없단다.” 하니까 아버지가 금방 오셨어. 손에 기름을 닦더니 트럭 한 대를 몰고 내일까지 내가 해오마.” 하셨어. 나는 완전히 뭔가 잘못이 된 것 같아서 난 슬프더라구. 그날 밤 아빠가 안 돌아오시더니 새벽에 오셨어. 그래가지고 호적을 만들어 오셨어. 전쟁 끝나고 엉망진창인데 47년에 태어나 서 19604월에 출생 신고가 됐어. 그래서 본적지가 숭의동 308번지야.  
 

선생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밭에서 넝쿨째 굴러나오듯이 이야기들이 나오는 거 같아요.
난 그런 것들이 다 생각나는 건 아니지. 그중에 특이하게 내 기억에  남은 거겠지. 어쭙잖게 내가 문학을 했다고 갖다 붙이는 게 아니고 그런 것들이 내 삶에, 머릿속에 울림이 있었던 게 아니겠어.
이야기하지 못할 괴상한 것들도 많은데 하나도 특이할 것이 없는데도. 날짜가 생각은 안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7월이면 방학을 하는데 장마가 졌어. 그런데 우산이 없었어. 그때는 일본식 종이 우산만 가져도 부자였어. 박쥐 우산 같은 거는 한 반에 한두명 있을까. 우산이 있어도 그런 우산은 아버지나 쓸 수 있는 거야.
잘 사는 집은 기름 먹인 종이로 된 대나무살 우산을 쓰는 거야. 고등학교 되니까 파란색 비닐 우산이 있었는데. 비를 맞고 학교에서 여기까지 걸어 오는데 우산이 없으니까 속옷까지 다 젖었지 뭐야. 그런데 그 불편함보다 숭의깡시장 어떤 노인네가 인중학생 비를 철철 맞고 가는구나.” 하는 소리가 어찌나 창피하던지. 나로서는 예민하고 쎈서티브한 것들이 남은 거겠지. 물고기 잡았던 거는 내가 즐거웠고 수봉산의 무덤은 무서웠고. 몰라요, 난 이런 게 많이 가슴에 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