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심을 흐르던 물길
문학동 일대 “신비마을 사람들이 석바위를 가려면 장다리를 건너야 했어” _이기영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8.25

 

신비마을 사람들이 석바위를 가려면 
장다리를 건너야했어

 

 

 

문학동일대
구술자:이기영(72, 1950년대부터관교동(신비마을)거주)
 
-채  록  일 : 2019년 12월 1(오전10, 15(오전830 
-채  록  자 :남희현 
-채록장소 주안8동 천주교회
 
 
 
 
내가 월남 가기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으니까.
논농사를 허다보니까 장다리를 너무 잘 알지. 승기천
흘러가는 게 신비마을 사람들 이 석바위를 가려면
장다리를 거쳐야 가는거야. 넓지는 않은데 시멘트
자리니까 장다리라고 그랬어. 그 당시에는 어리니까
기니까 장다리라고 하는지 알았는데 긴 다리가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면.”  
 
 
 
 
소개 부탁드릴게요
48년생 문학초등학교 나오고, 동인천중학교 나오고, 동인천고등학교 4회 졸업생이에요.
이기영입니다
 
수봉공원에서 기억하시는 분들, 용현동 지나서, 주안동까지 논밭으로 물길이 있었다고 기억해주셨어요
여기 성당 자리도 논이었어요. 여기 위에 삼영아파트라고 있는데 고기까지만 밭이고 여기가 다 논이었어요. 개발되어서 그렇지. 이 위쪽이 목장이 있었다고. 한신휴아파트는 공동묘지였어. 시립 공동묘지. 그 자리 허물고 아파트 지은 거야. 여기 위에 한신휴라고 있어요
 
선생님 여기서 계속 사셨던거예요
신비마을. 순복음교회 있지요? 그 뒤가 내가 살았던 데야. 순복음교회 앉은자리가 동그란 산이라구. 그걸 허물고 순복음교회가 사서 거기에 지은 거야. 거기가 발전할 걸 예견하고 거기에 지은 거지. 관교동 주민센터 바로 옆에 순복음교회가 있어
 
문학동에서 살면서 선생님께서 말한 곳에 논이 있어서 다녔던 기억을 이야기하신 분이 계세요. 롯데백화점(예전 신세계백화점) 근처에 마을 이름도 이야기해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거기 석말이라고. 신비마을 하고 석말 하고 마주 보고 있었어. 논을 가운데 두고.
 
여기 전체가 신비마을인건가요
승학산 있지요? 문학산 말고. 승학산 뒤쪽, 관교중학교 있는 데가 신비마을이야. 큰 신비, 작은 신비가 있었어요. 난 작은 신비마을에 있었고, 큰 신비는 한국 아파트 밑쪽으로 있었어. 순복음교회는 한참 저 구석가에 있잖아. 시골 마을이니까. 요 앞은 작은 신비, 큰 신비가 관교동이 되었지. 요기 바로병원 있지요? 지금은 바로병원 뒤가 집이야. 3년 전에 이사왔지. 구월1, 3, 주안8, 관교동. 요 앞에서만 살았어. 요기서만 돈 거야
 
누구보다 승기천을 기억하고 계시겠어요
그렇지. 기억은 하지. 왜냐면 내가 월남 가기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으니까. 논 농사를 허다 보니까 장다리를 너무 잘 알지. 승기천 흘러가는 게 신비마을 사람들이 석바위를 가려면 장다리를 거쳐야 가는 거야. 넓지는 않은데 시멘트 자리니까 장다리라고 그랬어. 그 당시에는 어리니까 기니까 장다리라고 하는지 알았는데 긴 다리가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면. 여기서 작은 신비마을에서 살다가 결혼하면서 분가했지. 여기(주안8동성당) 맞은편 구월동에서 10년 살고, 직장생활 하다보니까
 
그럼 승기천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여름에 장마지면 흘러넘쳐서 논 농사도 망치고. 최근 비가 오면, 80년대 초에 이 성당(주안8)을 지었는데 장마만 졌다하면 지하까지 침수가 되었어. 복개 공사한 다음에는 약간 덜한데 최근에 5,6년 전까지만 해도 침수가 됐는데 지금은 잡았어
 
그래요? 논 있고 해서 물이 빠진다고, 복개 공사한 다음부터 물이 찼다고 이야기하시던 분도 계셨는데... 
근데, 안 그랬어
 
승기천 폭이 얼마나 됐나요
주안동에서 온 물이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용현동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거지. 기계공고에서 취합해서 온 물이 흘러가지고 남동구로 해서 바다로 빠졌지. 승기천이라는 기
 
굉장히 폭이 넓었나봐요
그럼요 .폭이 넓은데는 7~8미터, 8~9미터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개울 양옆이 뚝이고, 양 옆은 논이고.
 
우마차나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 양옆에 있었고 나머지는 다 논밭이었군요
그렇죠. 다리만큼은 자동차,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이었지. 그래서 장다리라고 했지
 
그걸 통해서 석바위로 넘어갔군요?
석바위 넘어가면 그쪽이 개발이 안되서 땅이 질었어요 .빨간 흙이야. 장화 없으면 못 다니는 마을이었지
 
그때 당시만 해도 논농사하니까 비가 오면 굉장히 질었나봐요.
석말은 밭농사가 많았고. 신비 마을은 논농사가 많았지
 
수로이야기를 하시는데 저수지도 있었다고
저수지가 순복음교회 옆에 있었어. 논농사하려면. 순복음교회는 동그란 산이라는 것을 밀어서 지은 거구. 산이 동그란 게 있었다구. 그걸 허물어서 교회를 지은 거구 그 동산 옆에 저수지가 있었어. 신비저수지라고. 논농사 지으려고 
 
크기가 컸나요
내가 봤을 때는 거기서 수영도 하고 그랬으니까. 민물장어가  있었고, 참게(민물게)가 잡히고. 그게 아마도 시가 발달되고 그러니까 점점 없어지더니... 거기서 빠져 죽은 애도 있었어. 내 친구 중에. 익사였어. 꽤 깊었어. 그 저수지하고 승기천 하고는 관계가 없어. 수문을 열면 논으로 빠지는 거니까
 
굉장히 많은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였군요.
그게 신비저수지
 
그럼 수로 이야기를 하면. 
둑으로 된 수로야. 평상시에는 쫄쫄쫄 흐르는 물이었는데 비만 왔다하면 범람하니까 피해가 많았지. 농사짓는 사람이 큰 비 오면 걱정이 많았어
 
폭이 8~9미터면 깊이는 얼마나 될까요
그게  내가 기억하기로는 물 많이 있을 때는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해요. 찰랑찰랑 넘을 거 아니야. 깊으면 2m가 넘었을 거라구. 그게 넘치면 농토로 흘러갔어요. 비 안올 때는 애기들도 미꾸라지 잡으러 들어가고.
 
비가 안 내릴 당시에도 물은 항상 흘렀군요
그럼요. 물은 흘렀지. 말하자면 그게 생활용수 그런 게 합쳐서 흐른 거야.
 
선생님 48년생이시고, 지금 기억하시는 때는 몇 년도일까요
내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거든. 그 기억은 한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32~3. 30년 이상 기억을 갖고 있는거지. 승기천에 대한 기억
 
그럼 거기가 항상 흙바닥이었나요? 복개되기 직전에도.
그 당시에 수용되어 가지고 82년도인가 수용됐어. 그때부터 도시가 된 거지. 
 
그럼 복개 공사도 기억나세요
언제 했는지 기억은 안나고 장다리가 없어지면서 여기 도로가 생겼어. 이게 인주대로거든. 우리 집 주소가 인주대로로 되어있거든
 
선생님. 지금 저희 책 만드는데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고 계세요. 여기 토착주민들은 이사를 가시거나 돌아가신 분이 많아요 .게다가 이렇게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시니까요
많지요. 많이 갔지. 그럼요. 현재 신비 향우회가 있어요. 내가 향우회 회장이야. 내가 72세인데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아. 그 밑에 얘들이 50, 60대 이렇게 해가지고 스물다섯 명이 모여. 여기 근처에 사는 사람은 거의 없어. 결혼해서 다 나가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데 너무 많이 만나도 소용없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지. 12월에 송년회 겸 만나야지제가 공무원을 34년을 했어요. 내가 2008년도에 61세에 퇴직을 했어. 계속 봉사하는 거야. 그전에는 봉사는 했지만 직장이 있었으니까 이름만 걸고 토요일, 일요일에만 했는데 딱히 하는 일이 없으니까 발 움직이고. 건강비결은 그거여. 하루에 만 보 정도는 걸어 
 
어딜 그렇게 다니세요
봉사활동 다니고. 근래에 독서에 취미가 있어서 집에서 교보문고 가서 책 한 권 읽고. 제가 속독법을 배웠어요. 한 권 읽고 걸어오면 만보정도 걷는 것 같아요. 밥 잘 먹고
 
정말 대단하세요. 승기천 하면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시간이 지난 후에 기억나는 것도 좋구요.
어려서 거기서 수영했던 기억이 있어요. 비 많이 와가지고 하루이틀 지나면 물이 맑아지거든. 여름 같은 때는 거기 들어가서 빤스 입고 수영하고. 고기도 잡고. 그런데 그거는 얼마, 몇 번 안 되고. 그다음부터는 돈 번다고
 
중학교, 고등학교 가면 공부해야 되고 하니까 어릴 적 기억이 많으세요
그렇지. 초등학교 때. 우리가 승학산을 넘어 다니지 않으면 비석 거리라고 있었어. 거기 승학산 쪽 돌아가면서 비석거리가 있었는데 거기 사형장이었어. 문학에서 이름 좀 세운 사람들은 거기 비석을 세웠어. 그래서 비석거리라고 했는데 거기 없어졌어. 그리고 문학 향교가 맨 위에 조그만 게 하나 있었거든. 그래서 승학산 넘어서 문학초등학교를 가야 해. 그때 향교는 지금 향교에 비하면 아주 초라했었는데 지금은 아주 대단하게 지었잖아. 전수관도 있고. 
 
향교는 당시의 작은 학교니까 그랬겠네요
그때 당시에는 2,3학년에 거기 관청이 하나 있었는데 뱀도 나오고 그랬어요. 기와에서 뱀도 잡고
 
뱀 잡아서 뭐하셨어요?
죽였지 뭐.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욕했지. 거기 지키는 산신령 뱀인데 왜 잡아죽였냐고
 
그런 이야기 들으면 무섭지 않으셨어요? 꿈을 꾸거나.
아이. 꿈꾼 기억은 없고. 내가 직접 죽인 건 아니고
 
월남 참전은 그럼 언제 가신거예요 
22살때. 20개월 있었어. 내가 시체 처리병이야. 퀴논(베트남)에 있는 백육(106) 후송병원이라고 거기 근무했기 때문에 착출 돼서 가게 되었어. 병과가 편하니까 아무도 안 가려고 하니까 착출돼서 갔지. 내가 사연이 깊어요. 우리 어머니가 시집와서 6년 만에 나를 낳았어. 내가 원래 47년생인데 나를 낳았는데 쪼그매서 죽을 것 같아. 문열이야. 아이가 작은 걸 문열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1년동안 출생신고를  않고 있다가 내가 잘 있고 하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48년생으로 올렸지.   몰랐는데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구. 너 귀한 아들이라고. 귀한 아들이 월남을 간다니까 청량리에서 출발을 했거든. 그 양반이 청량리까지 와가지고는 면회를 왔더라구. 너 가면 어떻게 하냐고. 남동생이 둘이 있었고, 여동생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뭐. 
 
그래도 어머니한테는 귀하게 본 아들이고, 동생들 보게 했다고들 하시잖아요
걱정하셨는데 잘 갔다 오고. 안심은 하고 갔지. 난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 군생활은 편하게 했어 
 
물길이 옛날에는 많았던 거잖아요?
동네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있고, 그 개울이 모여서, 집합해서 남동구 쪽으로 흘러갔지. 중요한 거는 거기에는 어렸을 때는 망둥어도 올라왔어. 바다로 가는 승기천이니까 망둥어도 올라온 적이 있어. 망둥어 잡은 기억이 있어. 승기천에서
 
물고기 잡으면 어떻게 하셨어요?
집에 가지고 가서 먹었지. 그때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따라가서 게를 잡는 법을 알아가지고 몇 마리 잡고 그랬어.
 
민물 게는 어떻게 잡나요?
볕 뜨기 전에 나가서 게가 지나가는 구멍이 있거든. 거기 지키고 있으면 나와요
 
아버님이 아들 데리고 어스름녘에 게를 잡으러 가는 거예요? 새 벽에
그렇지. 내가 쫓아가서 잡았던 기억이 있어. 그게 굉장히 비싸대지금도. 참게가 안 잡히니까. 농약 쓰고 그러니까. 염천 쪽에나 가야 볼 수 있다고. 여기 없지. 우리 아버지는 논에 물꼬를 본다고 그래. 물이 잘빠지나 안빠지나. 그거 보려고 갔다가 잡힌 거야물꼬 보러 가는 길을 내가 뒤쫓아갔지. 내가 볼 때는 늦게 본 아들이 귀여워서 데리고 갔을 수도 있어요. 그물이나 뜰채가 있어야 잡는데 그게 없으면 힘들었어. 재미로. 그리고 내가 조금 소극적이었어. 말을 표현을 잘 못했어.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 말더듬이가 아닌가. 근데 군대 가서, 내가 대학을 가려고 삼수를 했어. 학원을 다니니까 그때부터 말이 좀 나아지더라구. 지금은 말로 많은 일을 하지. 연령회 교육도 하고. 원고 써가지고 가서 2시간 강의하려면 아주 힘들어. 연습을 많이 해가야 하는데 내가 써간 원고만 말하면 수강생들이 재미가 없잖아. 주로 내가 봉사한 이야기지만. 이름 없는 직책을 많이 맡아 가지고 집사람은 욕해. 그게 다 돈 아니냐. 회비도 내야 하고. 조금 있으면 그것도 못하니까.  
 
물길 이야기 하시는데 얼굴이 활짝 빛나는 걸 얼핏 보았어요. 그 당시를 회고하시면 드는 생각이나 느낌 있으세요
그때가 좋았던 거 같아요. 장다리가 있었던 때. 시대가 전부 개인주의 시대고 해서 나만 알고. 나는 천주교회 다니니까 기본이 이웃사랑이거든. 다른 거 없어. 그게 최고여. 이웃을 사랑하면, 그 사람도  날 사랑할 거 아니야. 지금은 각박하지만 그때는 집도 많지 않았고. 그럴 때가 다시 오려나. 안 오겠지. 아들이 서울에 상명고등학교 영어 선생인데 36살에 쓰러졌어. 뇌졸중으로. 2년간 휴직했다가 17년에 복직을 했는데 쓰러진 데가 운동 쪽으로 마비가 온 거야. 왼쪽이 어눌해. 생각하는 거나 말은 괜찮은데. 손주가 말하는데 한명, 9살인데 아주 똑똑하고 지 아빠 닮아서 영어 학원 다니니까 그 얘가 한 번은 와서 이렇게 말하는데 기뻤어.  “할아버지 나하고 영어로 회화로 해볼래? 내가 듣기론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 고모, 고모부 통역을 했다며?” 할아버지 쬐금 해. “어떻게 그렇게 잘해?” 허길래 20개월 월남 가서 하는데 할아버지 근무한 병원 옆이 미군 부대라 같이 있었어. 그러니까 영어가 늘어요. 손주하고 재미나게 이야기한 기억이 있는데 걔한테는 그런 기억이 없을텐데 그 아이가 여기 오면 월미도 이런 데 데리고 나가려고 한다고 
 
도시는 그때 기억을 담고 있지 못하네요
여기만 와도 이 근처에 우리 논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20m 정도 가면 우리 논이 있었는데. 한벰이가 1,600평이야. 열 마지기가 넘었다고
 
너무 신기해요. 옛날 이야기를 물었는데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 과거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이게 삶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과거가 그저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이야기까지 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좋게 봐줘서 고맙지. 장다리 이야기하니까 응했지. 또 뭐 하는 단체인지도 몰랐고
 
장다리하면 여러 가게가 있었다고 하셨어요. 장다리에 가게가 즐비하게 있었나요 
양쪽에 논이 있고, 그 밑으로는 승기천이 흘렀고. 그건 장다리를 넘어가면 석바위, 이쪽으로 가면 신비. 석바위 시장이 있으니까. 장다리를 넘어야 거길 갈 수 있으니까. 중요한 거는 장화 없이는 다니기 힘들었다는 거. 하여튼 내가 늦으면 석바위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거든. 운동화에 뻘건 흙이 묻어서. 그때 차장이 있었거든. 차장이 학생이 흙이 뭐냐고 막 뭐라구. 60년대 중반, 검은색 교복에 모자 쓰고 다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