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심을 흐르던 물길
주안동 일대 “물은 계속 흘렀고 맑았어요” _이태승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8.25

 

물은 계속 흘렀고 맑았어요

 


 

주안동 일대 
구술자 : 이태승 (58, 1960년대부터 주안동 거주
 
- 채  록  일 : 20191117() 오후6, 1213() 오후 630 
- 채  록  자 : 남희현 
- 채록장소 : 주안역 인근 카페
 

 
시민회관에서 신기사거리까지 길이 났었는데
저 초등학교 3학년 때 논 한가운데를 더 연장해서
지금의 신기사거리까지 길을 냈지요. 이쪽이 메인도로가
된 거지요. 옛날에는 아스팔트포장이 아니고 길이 쭈욱.
승기촌 좌우로가 논. 어린 나이에서 봤을 때 굉장히 넓은,
끝이 안보이는 느낌이었지요.”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제 이름은 이태승이고요. 그냥 나이로는 58, 올해 넘어가면 59세 되는 거구. 뭐 일단은 주안3동 이사미골, 옛날 저희 고향이죠. 저희 조상 대대로 살던. 저희가 10대 살았으니까 한 400. 원래 우리 부평이씨(富 平李氏)가 계양산 밑에가 저희 고려 초기 호적세력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저희 조상분이 고향으로 낙향을 안하고 선학동쪽으로 내려오셔 가지고 문학동, 관교동, 학익동, 주안동, 용현동 쭈욱 말하자면 형제들, 사촌들이 남구에 기존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겠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사회가 크게 변하면서 부평 이씨가 지금 미추홀구, 옛날 남구지역에 집거를 하게 되지요. 지금 동네 이름 자체가 집성촌을 형성해서 1980년대까지 이어지게 되지요. 16, 17세기 성리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향토세력들이 자리를 잡게 되잖아요. 각 가문들이 강한 시대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 저희 중 시조들이 각 동네마다 시조가 되는 거지요. 용현동 쪽에 이윤생 강씨 정려(열녀문), 학익동은  제운사거리의 이세주제운 선생이 있는 거고, 학산서원은 이정빈 문학동 저기고. 주안 이쪽은 사미라는 것이 지명이 넘어가는 거구요. 사미는 선비 사(), 아름다울 미()자인데 원래는 미자가 다른 글자인데 구한말에 이현경이라고. 이조판서도 하고 관직도 하던 분이신데 청백리가 있어서, 깨끗한 선비가 나 온 동네라고 문자화 되었죠. 사미골로 갔다가 일제시대 넘어오면서 이쪽이 충훈리거든요. 저쪽이 사미고 그게 합쳐져서 사충리가 됐다가 다시 주안정으로 됐다가 주안동으로 됐다가 다 분동이 돼서 주 안이 8동까지 나눠진 거고, 주안이 제일 넓지요
 
선생님께서 기억하는 승기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승기천이 수봉산에서 발원했잖아요. 현충탑 오른쪽에 발원지가 있어가지고 쭈욱 타고 내려와서 독정이 고개(용일시장)로 해서 용현사거리, 용남시장 뒤쪽으로 나가서 다시 석락아파트 쪽으로 나가서 인고 쪽으로 나가는 방향이에요
 
계속 이곳에서 사신 거예요
저도 어릴 적 기억이고출생은 서울에서 했고, 여동생이 생기면서 본가(사미골)에서 5살까지 살다가 주안사거리 쪽으로 가서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다시 몬머리(주안국민학교 있는 주안2) 쪽으로 이사 왔다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 본가(사미골) 쪽 옆으로 와서 이쪽에서 몇 번 이사하면서 지금 현재 빌라를 짓고 88년부터 계속 살고 있어요.
 
선생님이 승기천을 많이 기억하실 수밖에 없겠어요.
계속 주안에서 놀았으니까. 기억이 있는 상태에서 계속 왔다갔다 했고. 말하자면 본가는 저희 큰집이잖아요. 그러니까 학교 끝나면 심부름이던 놀거리 없으면 그때 걸음으로 15~20분걷는 거리였었고. 주안사거리 쪽에 있을 때는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왔던지 몬머리에 있으면서는 시각이 트이니까 학교 끝나면 점심 먹고서 밭에서 시금치 나서 싸주면 챙겨가고. 논만 건너면 되니까. 그런데 몬머리에서 사미골까지는 길이 없었어요. 다 논길이에요. 그 중간에 승기 천이 지나가는데 그나마 다져진 거구. 뚝방처럼 다져져 있지요. 논길 쭈욱 따라왔다가 여기까지는 다리가 없는 거예요.  
 
여기까지라는 거는
승기천이 말하자면(몬머리와 사미굴의) 경계가 되는 거지요. 이리 넘어가야 하는데 다리가 없으니까 어떻게 갔을까요? 돌이 있었어요. 징검다리식으로 완전한 징검다리는 아니더라도 빠질 때도 있고 그걸로 되기도 하고. 소가 끄는 구루마라고 할까요? 우마차, 틀만 있는 것이 다리였어요. 승기천을 횡단할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지요. 그걸 조심조심 넘어서 논을 통해서 길을 올라가는데 소나무가 많은 산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언덕, 산길을 올라와서 중턱을 넘어가면서 마을이 있는 거예요. 성덕 교회가 산 정상부에 있었던 거예요  
 
새미마을에 친구를 찾아갔던 기억을 하신 분이 계세요? 새미는 사미골을 의미하는 거지요?
사미를 새미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듣는 말에는 왜곡이 생기잖아요. 저도 어려서는 새미, 새미 했어요. 큰집 가라든지 하는 말은 새미, 사미골 가라는 말이지요. 향토사를 배우면서 보니까 지형도에는 사미라 되어있는 거고 역사적으로 글귀가 남아있는 거지요용현동 어린이공원, 용남시장 뒤편으로 해서 용일사거리 지나서 나갔어요. 성덕교회가 정상에 있었지요. 신기촌이 형성되면서 인구가 많아지니까 차가 다니잖아요. 주안사거리 있는 데 결국은 논밭 길인데 불도저로 밀어서 길을 만들었어요. 주안7, 건강보험공단 앞쪽으로 나가서 아파트 지나가서 신기촌 쪽으로 나갔어요. 시장 입구로 5번 버스가 넘어왔지요. 시민회관에서 신기사거리까지 길이 났었는데 저 초등학교 3학년 때 논 한가운데를 더 연장해서 지금의 신기사거리까지 길을 냈지요. 이쪽이 메인도로가 된 거지요. 옛날에는 아스팔트 포장이 아니고 길이 쭈욱. 승기촌 좌우로가 논. 어린 나이에서 봤을 때 굉장히 넓은, 끝이 안 보이는 느낌이었지요
 
지금 도로만 생각해도 쭈욱 이어진 길, 물길이었겠어요. 
옆으로 집들 지어져 있는 것이 논이었고, 그 자체로 인천에는 평지가 없었어요. 원래는 문학경기장 앞쪽에 만평지가 있었고 나머지는 다. 승기천이 내려오면서 늪뻘같은 느낌이었을 거예요. 사람이 유입되고, 일제시대 때 논밭으로 모양새를 만들었을 거구. 저희 사는 동네도 산이 있고, 성덕교회 이쪽 용현동 쪽으로 깎아서 밭으로 되어 있고, 그 밑쪽으론 논인거구. 산 중턱에도 집들이 있는 데는 가까운데 논하고 있는 거구. 승기천에서 오는 원류가 몇 개가 있어요. 또 지류가 많아요. 왜냐면 논 사이로 물이 흘렀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물이 정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아니고. 옛날 집들은 하수도 개념이 없으니까 같이 겸해서 나간 부분도 있고. 60년대 중반 되면서 주안2동 몬머리쪽도 그렇고, 신기촌 쪽도 그렇고 사람이 들어오면서 하천개념이 되었지요.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돌로 이렇게 하는 둑 방식이 아니었어요. 흙으로 다져져 농부들이 소 몰고 다니는 길 정도. 논길 사이사이, 작은 구릉지대로 몬머리도 산이고, 여기도 산이었지요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기억이 잊혀지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어떤 기억을 제일 남기고 싶으세요?
우리 본가도 80년대까지도 350년 된 기와집이니까. 그런데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게 없고. 기억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디테일하게 남아있는 게 없으니까. 돌아다니기 바쁘니까 작년의 기억과 올해의 기억이 흐릿흐릿해지니까.  
 
그래도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거 같아요. 시기는 70년대 초반의 기억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60년 중반에서 80년대 초까지. 왜냐면 그때는 승기천이 복개가 되었으니까
 
복개되는 걸 보셨나요? 80년대 후반이 아닌가요
80년대 초예요. 논에 벼를 안 심었어요. 파서 시멘트 블록화하면서 안에서 쭈욱 넣으면서 진행이 되는 거예요. 승기천만 복개가 되는 거예요. 논 한가운데 승기천 둑방있는 자체를 일직선으로 시멘트 블록하게 되면서 길로 있다가 1년 있다가 주변이 메꿔지는 거지요
 
, 그게 인주대로가 되는 건가요
. 그러면서 평지화하면서 인주대로 만들고, 아스팔트 길이 되면서 지번지가 1400번지, 1300번지가 형성되어 나갔어요. 주안3동은 7~800번지가 끝이었거든요. 그런데 거기가 인주대로 끼면서 1200번지, 1400번지까지 생기지요. 지금의 도로명하고 좀 다른데 도로명이 두 번 정도 바뀌어서
 
그러면 복개공사를 보신 때는
고등학교 때. 동네니까 봤지요. 저희 본가는 798번지예요. 이게 1418번지로 되었어요.
 
승기천하면 뭐가 제일 먼저 기억나세요?
. 논하고 비 오면 흙탕물. 그때는 돌계단도 안되는 거구. 둑이 흙이잖아요. 시멘트가 아니잖아요. 장화 아니면 다니지 못하는 동네였지요. 미꾸라지, 붕어 잡고. 몬머리쪽 친구들하고 잡고 먹기도 하고. 개구리도 해서 먹어보기도 했어요
 
지천이 논에, 개구리에, 다 놀 거리였겠어요 
그런데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몬머리쪽에 있었고, 몬머리쪽이 7,80년대 도시화 되는 거였고. 본가는 옛날 기와집이었고. 그쪽(몬 머리)도 기와집 있었지만 빨간색 기와집, 신식 기와집이고. 주안사거리, 시민회관 쪽으로는 2, 4층 신식 빌딩들이 생기고 그 뒤에는 논밭, 기와집, 초가집 있었지요. 구멍가게도 기억하고 있고. 만화가게, 솜틀집, 이발소, 그리고 제일시장이 70년대부터 만들어진 거예요. 왜냐면 국민학교 동창들이 거기 있었으니까. 주안사거리에는 방앗간 아들 친구도 있었고. 그게 길 나면서 없어지고. 몬머리쪽에는 구멍가게도 있었고, 금성연마라는 공장도 있었고, 목재공장도 있었고, 양조장도 있었어요. 상여를 보관하던 창고도 있었어요. 밭 한가운데. 그래서 밤에는 좀 무서웠어요. 시멘트로 해서 창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나무문으로 안은 잘 안보이는데. 그런데 친구네 가려면 밭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산등성이 개간한 거니까. 그래도 주안2, 몬머리 쪽은 개발되는 상황이라 지금은 다 부서졌지만 빨간색 신식 기와집 생겼던 것, 벽돌집, 인조라 고 하나, 벽에다 돌을 붙인 집들이 나오고 그랬지요. 시민회관 사거리쪽으로 나가다 보면 하천 같은 게 있었어요. 제 입장에선 개천같은 건데 결국 집들 생기면서 중학교 때는 복개되어 가지고. 우리 사는 동네도 동산. 다른 사람들이 부르기엔 까치산. 기계공 내가 기억하는 승기천 101고에 밴드부가 있었는데 맨날 와가지고 부르고 가기도 하고
 
만약 승기천이 남아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요
만약이라는 전제가 되는 건데 답은 없지요. 있는 것도 없애는 판에 그게 제대로 되었겠어요.
 
미추홀구는 어땠다고 생각하세요? 낌도 좋구.
제 입장은 학생이었으니까 승기천 있던 자체에서는 그렇게. 단지 별을 보지 못한다는 것. 하늘 쳐다보면 별이 쏟아졌는데 이제는 영종도, 덕적도, 백령도 가야 별을 보니까. 인구가 늘어나면서 산업화, 공단 생기고 공기도 안 좋아지고. 지금 수봉산에 물이 안 흘러요. 현충탑 옆으로 물이 내려왔던 부분이 시멘트로 해서 물길이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시멘트 구조물만 남아있어요. 몇 번 변형되어서 그렇기는 한데 주안 쪽으로 가는, 독정이 쪽으로 가는 물길이 있고. 어차피 물길이라는 게 가면서 늘어나는 건데 워낙 짧다 보니까. 독정이 뒷길 보면 폭이 좁다고 이게 무슨 승기천이야 느낌 들지요. 그런데 내려온 길로 따지면 그것도 꽤 넓을 수 있는 거지요. 물은 계속 흘렀고 맑았어요. 비가 오면 흙물이 되어 발목 정도였던 것이 허리까지 오기도 했고
 
선생님이 기억하시는 것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물길을 기억하시는 거구, 그 당시 미추홀구를 기억하실 때 비가 오면 장화가 없으면 안되지만 밤이 되면 별을 볼 수 있던 곳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