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심을 흐르던 물길
용현동 일대 “그물 가지고 미꾸라지도 잡고” _오인영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8.25

 

그물 가지고 미꾸라지도 잡고
 

 


 
용현동 일대
구술자
:오인영 (75세, 1960년대부터 용현동 거주)
 

-채  록  일 : 2019년 10월 16일(수) 오후 6시
-채  록  자 : 문성예
-채록장소 : 학산지속발전협의회사무실

 

 
그게 어디냐면 지금 용일초등학교 뒤에 보면 새한아파트 있죠?
새한아파트 그쪽에가 조금 컸어요. 독쟁이(독정이)고개부터 흘러내려
왔던 거고. 독쟁이(독정이)고개에서 시장 있는 데로 해서 굴다리 있죠?
인하대학교 가는데 굴다리로 해서 조금 지나가면은 이렇게 빠져
나가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의 물줄기는 어디냐면 인천기계공고,
뒤쪽 수봉산에서 내려와서 물길이 같이 만나는 거야.”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미추홀구 사진인연합 회장. 그리고 학산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운영위원장.
 
연세는 어떻게 되시나요?
일흔 다섯
 
미추홀구에서 거주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1964년도에 인천에 왔어요. 미추홀구에.
 
그 당시에 인천에는 어떻게 오게 되신 거예요?
그때? 학교 들어오려고 왔죠.
 
그럼 그때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64년이면.. 20, 64학번이니까.
 
그때는 어디 사셨었어요?
독쟁이(독정이)고개. 독쟁이(독정이)가 고개가 막혔어요. 도로가 끊어졌어.
 
제가 지금 용일자유시장에 있거든요. 거기가 원래 그 마을버스로 인하대까지 갔었다고.
안 갔어. 그거 잘못 안 것이야. 마을버스는 주안역에서 제물포로 온 거밖에 없어, 마을버스는. 이 인하대학교를 가려면 제물포에서 내려서 숭의초등학교 철로길 옆으로 해가지고 용일시장 있는 데로 해서 거기 돌아가는 데 있어요. 올라가는 데. 그 농협 앞에서 올라가는 조그마한 길이있어. 거기로 해서 넘어갔단 말이야. 거기 산이 뚫리질 않았어.
 
그때는 뚫리지 않았었구나. 그럼 혹시 승기천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으세요?
승기천? 승기천을 기억나는 게 뭐 별로 없긴 한데 조그마한 개천이었지. 조그마한.
 
개천이요? 어디 있었어요?
그게 어디냐면 지금 용일초등학교 뒤에 보면 새한아파트 있죠? 새한아파트 그 쪽에가 조금 컸어요. 독쟁이(독정이)고개부터 흘러내려 왔던 거고. 독쟁이(독정이)고개에서 시장 있는 데로 해서 굴다리 있죠? 인하대학교 가는 데 굴다리로 해서 조금 지나가면은 이렇게 빠져나가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의 물줄기는 어디냐면 인천기계공고 뒤쪽 수봉산에서 내려와서 물길이 같이 만나는 거야, 용일사거리 밑에서. 그러니까 용일사거리 쪽에도 흘렀고, 용일사거리, 용일초등학교 앞으로도 흘러들어 갔고. 다른 또 하나는 승학산에서 신기사거리 있죠. 그리로 흘렀던 거야. 진흥아파트가 원래는 화장터 자리예요. 그래서 현재 정수장 있는 곳, 그 위에 문학동 넘어가는 데 바로 거기에 흘러서 내려오고 그렇게 합쳐지는 게 동양장사거리까지 가서 이제 커지는 거지.
 
그래서 거기가 제일 컸던 거네요? 다사 방에서 모여가지고?
그렇지. 컸지. 보건소 자리가 주안 쪽으로 가고 ,주안4동과 2동 사이 그쪽에도 흘렀고. 그래서 거기가 좀 컸어요. 동양장사거리 있는 데 그게 좀 큰 개울이었지.
 
제가 한 번도 여기에 물길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그 개울, 계곡이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거예요? 폭이 좁은 이렇게 물이 졸졸졸 흐르는 건가요?
그렇죠. 졸졸졸 흘러서 내려간 게 지금 저쪽에 보면 터미널 지나서 보면 넓잖아요. 그게 천이라고 하잖아? 천이라고. 원체가 개울이지, 이쪽에 내려가는 거는 개울이지.
 
그러면은 물웅덩이처럼 이렇게 있었던 거예요?
그냥 흘렀지. 조금씩 흘러가지고 빗물이 많이 올 때는 미꾸라지도 잡고 그랬어. 여기 용일초등학교 있는데도.
 
미꾸라지가 잡혔어요?
그럼. 용일초등학교 뒤에 새한아파트 있는데 거기가 당면공장이었어요. 그러니까 거기 앞에서 미꾸라지들 잡고 그랬다니까. 그때 당시에는. 물이 깨끗했을 수밖에 없지.
 
물이 계속 흐르고 고여있지 않으니까 가능했겠네요?
그렇게 많이 흐르지도 않았어. 지금같이 생활 하수가 정화돼서 내려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는 그러니까 비가 오면 좀 많이들 흘러갔고 평소에는 조금씩 내려갔지. 많진 않았지.
 
흙도 되게 좋았다고 그러던데요?
땅이 좋았다는 거보다도 그때 당시에는 깨끗했을 적엔 옛날엔 우리가 논물도 그냥 받아서 먹었잖아요. 지금은 못 먹지만. 그런 시절이야 그때 당시에는. 60년대에는 그러니까 독쟁이(독정이)가 이게 여기서 남구청(미추홀구청)에서 가서 이쪽으로 용현3동 가는 데는 배 밭이었어. 그러니까 거기로 가지도 못해. 막혀서 돌아왔어. 여기가 그 조그만한 미니버스가 다닌 거야, 동인천까지. 그런 시절이야. 봉고차 큰 게 그런 게 왔었지. 그리고 넘어가지를 못해. 그러다 뚫린 게 70년대. 70년대 말 정도, 도로가. 그러니까 용일초등학교가 생기고 용정초등학교가 생겼지. 그러니까 수봉산 물이 독쟁이(독정이) 쪽으로 많이 빠져갔지.
 
그럼 수봉산 물이라고도 불렀겠어요?
수봉산 물이라고 부르진 않았어. 그냥 개울이라고 했지, 개울이니까. 지금 우리가 천이라고 그러지, 도로를 확장하고 그러다 보니까 용현천이라든가 그렇게 커진 거지. 크게 만들어 놓은 거지. 그때는 그냥 이렇게 흙같은 것 있고 수풀 있고. 그냥 흙하고 수풀하고 그렇게 흘러갔던 거지. 그러니까 도시개발을 하면서 자꾸 둑을 쌓고 그러다 보니까 용현천도 여기서 깊어진 거 아니에요. 학익천에서 이렇게 내려오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똑같은 거야. 학익천이란게 천이 아니야, 개울이야. 천이란 건 큰 거를 얘기해요. 그다음엔 강 아냐. 천 다음엔 강인데 우리가 개념이 무조건 천이라고 부르니까 그렇지. 공천천, 굴포천. 이 정도는 돼야 천이지 승기천이나 학익천, 용현천은 천이 아니지. 도랑밖에 안 되지. 그러니까 이렇게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은 남구청(미추홀구청)에서 가고 이렇게 내려가잖아요. 그러면 내가 여기가 집이었어요. 여기 주택이 일곱 채가 있었어요. 농협 있고 여기가 국민주택이었어요, 그때 당시에. 60년대에는.
 
60년대에 국민주택이 있었어요? 어떻게 생긴거예요
조그만 집, 똑같이 지은 거지. 주택으로 똑같이 단층으로 일곱 채가 있었어요. (용현)시장 들어가는 데야 농협, 주차장 들어가잖아요? 거기 블록이 바로 일곱 채가 있었던 곳이야. 집이. 그래서 한쪽에는 배밭이었고 그랬던 것이죠. 개발을 하다보니까 지금 이게 이렇게 된 거지.
 
이렇게 보시면 이제 집이 한 채씩 생기고 이런 거를 다 기억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독쟁이(독정이)라는 데가 이 판잣집들을 개발하고 그러니까 이쪽으로 와서 사는 거야. 밀려가지고 .지금 용현1.4동 주민센터가 언덕 위에 있다가 지금은 도로쪽으로 내려왔잖아요? 저 위에 있는 데가 70년대 말에 거기 집들을 다시 지었어. 국민들끼리 거기에.
 
몇평씩 이렇게 받아서 했겠네요?
그래서 그거를 그렇게 한 거야. 그리고 안테나가 많았지. 그때는 안테나가 이제 대나무로 다가 대나무로 하다 보니 잘 안 들려. 그러면 올라가서 조이고, 바람불면 붙잡고.
 
만약에 그렇다면 그때 당시가 20대잖아요, 20대 때 승기천에서 에피소드 같은 것 있으세요?
미꾸라지 잡고 그런 것밖에 없었지. 그물 가지고 어렸을 적에 애들 데리고 가서.
 
집에 가지고 가서 해드신 거예요?
아니 해먹고 그러진 않고 그냥 장난삼아서. 학교도 여기 용일초등학교 주안초등학교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뭐 걸어 다닐 데도 없는 거야, 별로. 도랑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뭐 사람들이 느끼고 자시고를 못했지. 비가 나서 물이 가득 차고 지금이야 비가 오면 지금 막아놨으니까 이제 뭐 역류를 해서 물난리가 나고 그러지만 그때 당시에는 물난리가 뭐가 있어. 그때 당시에는 그냥 범람하면 물이 불었다가 쭉 빠져버리고.
 
왜 그 저기 동양장사거리 같은 경우에는 물에 많이 잠겼다는 얘기도 많이 했었잖아요?
그거는 복개하고나서 그런 거지.
 
오히려 복개해서 그런 거네요. 그러면 예전에는 논밭으로 땅에서 스며들었던 것이 더이상 스며들 공간이 없어지고 모두들 하수도에 집중해서 돌아가니까 그래서 범람한 건가 보네요?
그때는 개울이 좁았지만은 넓기도 했지요. 물이 흘러가는 거는 좁았지만 넓잖아. 그러니까는 그냥 쑥 쓸어 내려갔을 수밖에 없었지, 그런 개념이지. 그래서 비가 오면 허리띠까지 찼다는 소리를 하는 거고. 그때 당시에 비가 많이 오면은 찰 데가 있겠지. 그때 당시에는. 내가 60년대에 와서 72년도에 결혼해가지고 내가 아까 그 새한아파트 거기가 국민주택이야. 그 도로 옆이. 그러니까 개천을 쌓았다가 파다 보니까 그러니까 깊었던 거지. 원체가 도랑이라니까.
 
그러면 그때 당시에 복개 사업했던 것도 어떻게 공사하는지 보셨겠어요?
복개 하는 건 뻔하지 뭐. 그냥 녹관 갖다가 묻은 거지.
 
사람들은, 주변 분위기는 어땠어요?
그때 당시에는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주변 분위기야. 그냥 먹고 살기가 힘들었는데.
 
사진 찍으시잖아요? 그러면 그런 거가 남겨지거나 그랬으면 어떻겠다, 그런 생각 드시거나 그런 거는 없으세요?
사진 하는 사람들이요 7~80년대, 80년대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으면 가서 사진하는 사람들이 찍어주잖아요? 이렇게 가족을 데려와서 얼굴만 찍었어요. 나무에 올라가서 이렇고. 이런 환경을 안찍었지 그때는. 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말부터는 조금씩 변해가지고 거리의 풍경을 찍고 그랬지. 그전에는 안 찍었어요. 거리 사진 같은거는. 그래서 그 참 승기천 가지고 그러면 답답한거야. 개울을 갖다가 자꾸 얘기하니.
 
여기서 살아왔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앞으로 자식들에게 계속 물러줘야 될 공간에 물길을 상상한다면 어떤 물길이 어울릴까요?
승기천을 개방을 한다고 오픈을 한다고 해놓으려는 거 아냐, 사람들이. 사람들이 지금 승기천을 청계천마냥 개방을 한다. 그러면 물을 끌고 와야 돼, 또 그렇잖아. 물을 끌고 와서 여기 와서 수봉공원부터 내려보내야지. 그렇게 되는 과정인데 그게 쉽냐고. 조금씩 흐른 거야. 그것밖에 없었지. 비가 오고. 그걸 갖다가 자꾸 지금 범람한다는 것은 옛날같이 팍 터놓았으면 그냥 쭉 빠져내려 갈텐데 지금은 메워가지고 맨홀로 해서 이렇게 뚫어서 했으니까 역순환이 된 거고, 넘치고 그러는 거지 진짜 그정도의 개천이었으면 그냥 큰 강이 흘렀으면 그것을 피해서 집을 이렇게 짓거나 그랬을 텐데 그런 개념도 아니었으니까. 진짜 당연히 이렇게 묻고 길을 만들거나 집을 지을 생각을 나라도 했을 것 같은데.
 
그러게요. 수봉산도 그냥 거기도 묘지 있고, 판자촌 있고.
판자촌이 저 끝에 있는 거야. 저 끝에까지 있었어. 그러니까 별로 나무가 없어요. 문학산 같이 좀 나무가 있으면 되는데 그 문학산은 그래도 문학동으로 해서 터미널 앞으로 빠져나가니깐 그쪽에는 나무가 좀 있고 하니까 거기가 물이 좀 많지. 이쪽에는 없잖아. 벌거숭이 산에서 뭐가 있어. 수봉산도 산이라 그러는데 이게 뭐야 싶은 그냥 허허벌판이야. 허허벌판 같은 데서 그냥 뛰어놀기나 했지. 인하대학교를 가려면 장화 신고 저기 아니면 못 다녔어요. 장화 아니면 못 다녔다니깐. 용현시장 앞으로 해서 그 사잇길로 올라가서 운석교회 거기로 넘어간 거예요. 거기 아니면 길이 없었어. 많이 흙탕물에 빠지고 다녔지. 그러니까 용현성당 있는 데가 묘자리였어 그쪽 아파트자리가 공동묘지였어.
 
진짜요? 그럼 공동묘지 위에 아파트가 올라간 거네요?
요즘 같았으면 난리가 났겠지. 그때는, 거기 지금 산다는데 거기 시장(용일시장)은 옛날엔 용현시장보다 나았었어.
 
, 알고 있어요. 용일자유시장이 제일 컸다고 그러더라고요.
용일시장에 한일극장도 있었고 그런 바람에.
 
미추홀구는 밀려난 사람들이 온 거네요?
아니요 .밀려난건 아니야. 그런건 아니에요. 여기 터를 잡은 거지. 왜 그러냐면 제물포역 때문에. 제물포역, 남부역 있었어요. 여기 남부역이요 앞으로. 남부역이 뭐냐면 거기가 여주 이천에서 모래를 파가지고 여기다 여주 이천에서 거기로 온거야. 그런데 뭘 좀 하나 찾아서 보여주려고 해도 없네. 사진을 보여주려니까.
 
옛날에 승기천 찍힌 사진같은 것은 없으시겠죠?
그건 안 찍었죠. 아까도 얘기했잖아. 가족사진 찍으려면 나무 위에 올라가고. 얼굴만 찍고 그랬지. 전신을 안 찍었다니까. 그랬던 것 같아 나도 사진은 배경이 좋아가지고 배경을 두고 이렇게 찍은 게 아니니까 더 그런 것 같아. 그 미꾸라지 잡았다 그러면 내가 얘기한거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슨 미꾸라지가 거기 있었냐고 그래 사람들은. 그게 몇 사람이 안 될 거야. 비가 왔을 적에 미꾸라지가 올라왔지, 비가 안왔을 적엔 미꾸라지가 없지. 비 그치면은 물이 흐르잖아. 항상 고기는 물을 타고 올라오잖아. 항상 미꾸라지고 뭐고 다 올라온다니까.
 
그러면 혼자간 게 아니라 아이들이랑 같이 가셨다고 그랬잖아요?
그때는 아이들. 우리 아들들 데리고 가서 너희들이 한번 잡아봐 그러고 그랬지. 내가 64년도에 인천에 왔지만 72년도에는 이제 거기서 살았으니까. 나는 용현동 여기 토박이에요.
 
그럼 맨손으로 막 잡았던 거예요? 아이들이?
그렇죠. 가서 잡고 뭐 놓치고 뭐 그런 재미야. 그때는 놀 것도 없었잖아.
 
그때는 놀 것도 없었으니까 확실히 그런 주변의 것에서 놀았던 것 같아요. 흙 파고 놀고.
그니까. 땅따먹기 하고 사방치기 하고 그런 거여, 그때는. 그런 시절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거 하고는 많이 동떨어져요 지금은.
 
지금은 많이 바뀐거겠죠?
바뀐 거지. 천지개벽을 한 거지. 이렇게 바뀐 거는. 지금 봐요 지금 주안2동에 지금 옛날 모습 봐. 나는 지금 후회해. 얼마 전에 헐었잖아, 이렇게 다. 지금 헐잖아. 헐어버린단 말이야, 지금. 개발하느라고. 그 사진 못찍은 게 나도 후회돼. 왜냐면 옛날에 한번 찍었어요. 올라가서 저기 올라가서 다 찍어버렸어. 그런데 이쪽 편에서 다시 한 번 찍었어야 되는데 내가 왜 안 찍었을까 후회가 돼. 사진이라는 게 한다한다 하면서 쉬우면서도 어려운 게 사진이에요. 기록이라는 게.
 
그렇구나. 그러면 마지막으로 미추홀구에서 토박이로 사신거잖아요?
그렇지. 토박이라고 봐야겄지. 55년을 살았다고 봐야겄지. 내가 20대에 올라왔으니까, 지금 70이 넘었고.
 
선생님께 미추홀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
의미 별로 없어요. 미추홀구로 바꿔 놔가지고. 주민등록이 다 되어있고 사업자가 다 되어있어서 그렇지. 여기 새한아파트 팔면 떠난다고 봐야지.
 
그러면 만약에 미추홀구가 굉장히 개벽할 정도로 많이 바뀌었잖아요. 어찌됐던 자손들한테 다 물려줘야 될 공간이잖아요. 만약에 또 바뀐다면 미추홀구가 어떻게 변했으면 좋겠어요?
뭐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안바뀌었으면 좋겠는 거예요?
그렇지. 나는 그냥 집 있는 거 수선해서 살고 썼으면 좋겠어. 개발하지 않고 있는 집을 다시 보완해서 썼으면 좋겠다니깐. 지금 이쪽에 숭의1, 3동 전도관 밑에 거기도 그걸 가져다가 보수를 해가지고 하면. 일반인이 못 하면은 구에서 해가지고 다시 살면 좋겠는데 구가 돈이 있나? 그렇게 해놓는 게 좋다, 이거지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부수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집을 보수하고 잘 채워졌으면 좋겠다.
그렇죠. 그게 난 바람인 거지 뭐 다른 건 없잖아. 그런 얘기야. 때려 부숴봐야 아파트 짓는 것밖에 더 있어요, 아파트. 그렇다고 거기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그래서 거기에 주민이 돈 받아가지고 거기를 못 들어가요. 다 떠나는거야. 하나의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야. 사람들은 다 떠나버려. 여기 못살아. 내가 71년 전에 평양에 갔다 왔지만 평양도 벌거숭이 나무야, 산이 나무가 없어. 그런데 물이 흐를 리가 없어. 산사태만 나지 .그래서 나는 여기 미추홀구가 옛날 거를 그대로 보관하고 다시 지속하는 게 좋은데 그런 게 없이 부숴버리는 것밖에 없고 그런 상황이란 말이야, 지금 항상. 그래서 애처로워서 항상. 다른데, 다른 도시에 가보면 옛날 집 보수하고 그렇게. 중국 같은데 보면 1300년 전역사의 그런 게 흘러 내려오잖아. 그런 게 없어. 우리는 무조건 때려부수고. 아파트 문화가 되어 버려서. 참 그것도 극복 하기가 힘들어.
 
아무래도 불편하고 그렇죠.
민간주택에서 사는 게 참 힘들어. 아파트보다는. 아파트가 편하고 그러니까 다 들어가면 뭐 자기의 공간만 딱 있으니까. 60년대로 돌아가 보자고. 60년대로 돌아가봐. 지금이랑 똑같은 이야기야. 그때 당시에는 먹고 살기 바빠. 아이들 공부하기에도 바빠. 그때 당시에 3천원이면 엄청 큰 돈이야. 물가도 쌌지만은 그거 가지고 살았다니깐. 그거 가지고 아이들 공부 가르치고 해봐 얼마나 힘든가?
 
힘듦을 사실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그때 힘든 것도 진짜 힘든 거고, 지금 청년들이 힘든 것도 진짜 힘든 거고. 가짜 힘든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80년대 말 지나 이제 조금씩 그 골목을 배경을 놓고 찍고 그랬지. 그 전에는 없다니까. 찍어 봤자 옛날에는 대문 앞에서 가족사진 찍는 거? 내가 70년도 초에 인하대학교 후문 있잖아요, 거기가 비포장이었어요. 그때 당시에 우리 아들 손 잡고 가는 걸 내가 이렇게 찍어놓은 게 그거밖에 없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