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목공예 마을의 정직한 제페토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3.01.17  | 최종수정일 2023.02.25



"아침이면 부지런히 7시 전에 나와서 청소하며 하루 시작하는 거죠. 나무로 해달라면 뭐든지 다 해. 종류는 헤아릴 수 없죠. 노후에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는 튼튼한 의자를 만들고 싶어.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어 놓으면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가 있으니까."
 




1. 고향과 유년 시절의 추억

생년월일과 고향을 말씀해 주세요.
59년 6월 5일. 원래는 개띠인데 그때 나하고 동생하고 1년씩 줄어 갖고 돼지띠가 됐죠. 아버지는 강화 쪽이고, 어머니는 전라도인데 서울에서 만나서 인천 쪽에서 자리 잡고 용현동에서 많이 살았어요. 용현시장 부근 거기 못 가서, 남구청하고 한 중간 정도 되는 거지. 우물이 두 개 있었어요, 쌍우물이라고. 그전에는 그 우물물 전부 다 먹고 살고, 그거 갖고 빨래 하고. 거기서 한 23년 인가 살다가, 물텀벙이 그 뒤쪽, 용마루 쪽으로 이사 가고.초등학교 때는 몸이 약해서 봄만 되면 횟배를 앓아 개근상 한 번 못 타고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한 번 타봤어요. 그때부터는 체력이 조금 됐지. 부모님들은 장사하시느라고 시장 한 구석 노상에서 고생 많이 하셨지. 수입이야 겨우 먹고 살 정도지 뭐. 그때 당시에 학교를 세 명 다 다니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전부 무상교육이지만 그때는 기성회비 그런 게 있어 가지고. 그것도 제대로 못 내고 다니고 그럴 정도였으니까. 도시락은 뭐 그냥 김치에다가 보리밥이지 그때 당시.초등학교 때는 용현시장에서 독정이 고개 넘어서 용일학교 쪽 거기까지 걸어 다녔지. 옛날에는 골목 쪽이 (용일 초등학교) 정문이었어요. 담 바로 뒤쪽으로 다가 용남시장 자리, 거기가 다 중국 사람들이 당면 공장 하고 그랬어. 우리 다닐 때는 거기 그쪽에 논밭이 많았어요. 논에서 개구리 많이 잡아 먹었지.동문에서 장학금 같은 것도 많이 했더라고요. 얼마 전에도 송년회 했어. 우리 7회가 그래도 잘 뭉치더라고요. 처음 만난 게 졸업하고 한 25년, 30년 만에 만나니까는 처음에는 모르겠더라고. 그래도 이름표를 달아놓고 그러니까 몇 번 보니까 옛날 얼굴이 나오더라고요. 그때 57년, 58년, 59년, 60년. 그 사람들이 제일이 많았었지. 학교도 10 몇 반까지 있었고. (한 반에) 60명도 더 있었지.중학교는 항도. 신흥동 해광사 밑 있는데 거기 있었는데 그게 선인재단이에요. 중학교 때 여기서 신흥동까지 걸어 다녔으니까. 청과물 시장이 있었지. 중학교 때는 또 신문도 돌려보고, 한 2년 했죠. 우리가 신문 돌리느라고 제물포에서부터 하인천까지 열차를 타고 다녔죠. 그리고 올 때는 하인천에서 용현동까지 걸어서 오고. 제물포(역사) 옛날에 여기 2층으로 안 돼 있었고 1층에 있었을 때, 그때 거기서 전철 타고 하인천까지 가면은 그냥도 막 타고 다니고 그랬었지, 옛날에.

  


2. 생계를 위해 목공예의 길에 들어서다.

언제부터 목공예 일을 하셨는지요.
목공예는 그때 당시 식구가 여럿이다 보니까 먹고살기 힘드니까 어려서부터 했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한 1, 2년 있다가. 3남 1녀인데 위로 형, 내가 둘째, 밑에 남동생, 여동생. 형제들이 여동생만 빼고 다 연년생이에요. 그때 당시에 집에서 장손이 잘되면 전부 다 잘 될 거라고 장손만 믿은 거죠. 엄마 아버지가 노점 장사하시고 그랬으니까. 한 사람 대학교 다니면 그때 당시에도 1년 치 등록금하고 학비가 100만 원이 넘었거든요.
직장은 기술 배울 때 그때 잠깐 있었지. 용현동 가정집에다 기계 놓고 옛날엔 다 그런 식으로 했어요. 공장이라고 번듯한 데도 없고. 70 한 2, 3년도 될 거야, 열일곱 살 때.
목공이라고 별거 없고 아까 제가 야구 방망이 깎아 드렸듯이 목선반 그거를 계속 하다 보니까 그게 안 돼요. 중국에서 물건들이 다 들어오고 막 외국에서 물건들이 들어오고 그러니까. 일거리가 없는 거야. 일거리가 없어서 가구 짜는 걸 어깨너머로 배워 갖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주로 하는 거는 나무 상자. (양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물리시며) 끼워 맞추는 코너로킹해서 이렇게 끼어 맞추는 거죠. 저게 수출품이에요.시작은 숭의 목공예마을인데. 원래는 그 고전(고전공예) 자리가 우리 선배가 했었던 자리예요. 선배가 하다가 나도 거기서 잠깐 한 1, 2년 있었고. 그러다가 내가 어디로 갔냐면 동산학교 쪽 앞에 그쪽으로 갔어요. 동산고등학교 앞에 거기서 한 십오 년 했죠.거기도 우리 선배가 하던 덴데 ‘명진공예’로 내가 인수 받아 거기서 십오년 동안 했어요. 선배님인데 거래처도 많고 그런데 연세도 있고 몸이 안 좋으시다고. “야, 너 이사해야 되는데 갈 데 없으면 여기 와서 좀 해라. 내가 여태까지 하던 일들도 많이 있고 그러니까 니가 하면 괜찮을 거다.” 그 형님한테 항상 고맙게 생각하지. 명진공예에서 보르네오 가구 손잡이 85년도에 한 5년 하다가. 90년도부터 동산학교 앞에 거기가 옛날에 제재소 자리였어요, ‘세기 제재소’. 옛날에는 송림동에도 제재소가 많았어요. 85년도만 해도 한 200만 벌어도 많은 거야. 공장장 월급이 150에서 200도 안 됐는데 내가 공장장보다는 더 벌었지. 그런데 배속에다 다 저축했지 (웃음).

59년생이시면 지금까지 몇 년을 하신 거죠?
40년. 그런데 세월만 갔지 크게 한 것도 없어요. 지금은 내가 하던 일이 있고 또 여기(서울공예) 하던 일이 있고 그러니까 일이 곱이 됐죠. 그러다 보니까 아침에도 보통 10시 넘어야 (출근하고) 공무원보다 더 했었는데. 지금은 부지런히 아침이면 한 7시 전에 나와서 뭐 할 거 없으면 청소를 하면서 하루 시작하는 거죠. 일이 바빠요. 지금 여기서 3개월하고 이틀 됐어요. 숭의동 목공 하는 사람들 옛날부터 다 알아요. 제가 워낙 오래 했기 때문에.
옛날에 그리고 서희 아파트(도원동) 짓기 전에 그쪽 길로 다가 목공소들이 많았어요. 그 건너편 쪽에 공예사들이 있다가 거의 철거되면서 다들 이쪽으로 온 거죠.옛날에 배다리에도 공예 거리가 있었어요. 그게 80년도 이전에 있다가 한 87년도 그때 그쪽이 개발이 됐을 거예요.





3. 나무, 친구보다 속내를 더 잘 아는.

야구 배트 만드는 거는 원래 물풀레 나무라는 거 그걸 써요. 그게 질겨 가지고 도끼자루 같은 것들도 다 그걸로 쓰거든요. 근데 누가 운동한다고 무거운 나무를 원해 갖고 멀바우로다가 하나 깎아줬던 거지. 인도네시아 멀바우라는 나무거든요. 수입목인데 천연 그대로 쓰는 바닥재나 인테리어용으로 쓰는 거예요. 나무가 좀 단단하니까 바닥재로 많이 쓰는데, (비를 맞거나 하면) 나무에서 물이 빠지기 때문에 외부용으로 못 쓰고 아파트 같은 실내 바닥재 그런 걸로 쓰죠.
우리가 고무나무 집성목 갖고는 원형 계단을 하고 있죠. 소나무 같은 것보다는 단단하지. 애견 배변봉투함은 일반 스프로스, 소나무 종류죠. 그것도 스텐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고 그러는데. 스텐이 미관상으로 보면은 나무가 낫다고 그래서 나무로 만들어진 게 있어. 그리고 저 나무 상자는 자작나무 합판.지금 쓰는 거는 몇 가지 안 되죠. 레드파인, 고무나무, 뉴송도 쓰고, 특수한 거는 멀바우. 이게 멀바우 집성목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아카시아 집성목. 집성목은 나무를 붙여서 만든 거야.
국산 나무로 해보고 싶은데 느티나무는 고급이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나무지. 괴목이라고도 그러잖아. 동네 어귀에 가면은 정자나무라고도 그러고.

채색과 도료는 어떤 것이 있는지.
간단간단 하는 것만 여기서 채색하고 도료를 하지. 환경 때문에 칠을 하게 되면은 걸려버려. 도장 같은 거 하려고 그러면은 시설이 다 갖춰져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 큰 것들은 김포 쪽 도장 공장에다가 맡기고, 전문 업체에다 맡겨야 돼요. 여기서 하는 거는 그냥 간단간단한 거 그것도 눈치 봐 가면서 해야지.


             

4.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주는 목선반과 그 외 기계들

로구로에 대한 기술 좀 여쭤보고 싶거든요.
로구로는 제가 스무 살 이전부터 했어요. 지금은 목선반이라고 하지. 쇠깎는 걸 선반이라고 그러는데 목선반은 나무를 깎는 거. 예를 들어 식탁 다리나 가구 손잡이 같은 거, 프라이팬 손잡이라든지, 칼 손잡이. 동그랗게 깎는 걸 다 목선반이라고. 로구로 라는 게 일본 말이에요.근데 로구로가 90년대부터는 거의 일이 없다고 봐야 돼요. 왜 그러냐면 그전에는 2층에 올라가는 거 난간 계단 같은 거 그런 것도 다 로구로로 깎았는데, 그 기둥 같은 걸 전부 중국, 인도네시아 그런 쪽으로 다 수입해 오니까. 규격화해 대량 생산해서 딱 갖고 오게 되는 거죠. 국내에서 깎아서 쓰는 것 같으면 가격도 비싸고 가격 면에서 밀리는 거지. 지금 목선반은 거의 할 만한 게 없어요. 주문하면 식탁 다리 같은 거, 좌탁 다리 같은 거 몇 개씩 해주는 거지. 옛날처럼 홍두깨를 깎겠어요. 

 
목선반


기계 이름들이 일본 이름이 많아요. 띠톱을 갖다가 이제 오비노꾸라고 그러지. 모양 오리고 그러는거는 띠톱, 자르는 건 또 마루노꾸라 그러고. 톱 종류를 노꾸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지금은 톱을 아래 위로 내려가기도 하고 45도 각도로 눕힐 수도 있는데 축경사라고 45도까지 각을 줄 수가 있어. 옆으로 이렇게(팔로 각도를 나타내시며) 길게 칠 때 그러니까 기계가 조절이 되는 거죠. 테이블 쇼트라고도 그러고.
자동대패, 수동대패, 대패질을 해야되니까. 그리고 빼파(사포) 치는 거 있고 애치센다. 이거 따는 거는 (손가락을 맞물리시며) 코너로킹. 그러고 이제 동그랗게 구멍 뚫고 그러는 거 보루방, 드릴머신이라고도 하고. 네모나게 구멍 뚫는 거는 각끌. 자르는건 재단기라고 그러면 돼, 재단 톱. 목공 기계 파는 데가 있어요. 기계들은 다 우리나라 거지.
 
코너로킹머신

  


5. 세월만큼 쌓인 고객과의 신뢰

지금 남동공단에 큰 기업이죠. ‘오성 체육’이라고 그 사람들하고 제가 거래를 많이 했어요. 그 사람들이 나무 일만 있으면 나한테 다 시켰는데 지금은 대기업이에요. 오성 체육에는 늑목 하고, 뜀틀, 평균대, 체육관 의자 그런 거. 다 이렇게 가구 짜듯이 해요. 지금은 뭐 나무로 해놓은 게 별로 없으니까. 그래도 나무로 하는 거 있으면은 꼭 나한테 연락은 와요.
군납 하는 거 그런 것들도 좀 하고. ‘흥보테크’라고, 거기에서 군납하는 군용 박스 도 많이 만들고. 부품들 보관하는 박스였는지. 사이즈는 뭐 한 600에 1200, 1800(mm) 짜리도 있고. 큰 거는 뭐 한 2400 나가는 것도 있고 2000(mm) 나가는 것도 있고. 한 1~2년 정도 했을 거야 아마. 미송하고 소나무 종류 합판으로 해갖고 겉에를 만들고. 안쪽에는 동그란 것들이니까 굴러가지 않게끔, 합판만 박으면 약하니까 기둥 세우고 막 그런 식으로 보강 다 해가지고.
그리고 지금 신한 다이아몬드 목상자 일도 한 10년 넘게 한 거예요. 각 나라들 다 수출하는 거예요. 인조 다이아몬드, 수출품 담는 거야. 그것도 남동공단에 있지. 쇠 같은 거 그런 걸로 쇠를 깎다 보니까 금방 마모가 돼. 그러니까 인조 다이아몬드 그걸로 하는 거예요. 신한 다이아몬드에서 그거(인조 다이아몬드)를 받아서 수출을 하는 상자인 거죠. 한 달에 한 100개에서 150개.
내가 직접 맡아서 하는 게 아니라, 한쪽에서 소개해 갖고 자기네가 신한 다이아몬드에 들어가기 전에 그 안에 또 스폰지를 다 넣어요. 내용물이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스폰지 넣고 또 작업을 하거든요. 목상자는 원자재 재단해서 코너로킹으로 귀탱이 다 따고, 조립하고 락카도장 칠해서, 통으로 만들어 놓고 뚜껑하고 몸채하고 축경사로 쪼개. 실크인쇄로 인쇄해가지고 다시 조립, 경첩 달고. 한 열 공정이라고.
                 

 
목상자 경첩
  
코너로킹


우리가 ‘스타벅스 강남점’에 인테리어 일을 좀 해준 게 있어요, 벽면 인테리어지. 이게 (사진을 보여주시며) 커피 도구들. 그때 로구로 의뢰가 와 가지고. 거기 책임자가 와서 어떻게 어떻게 해달라고 했지.
나무로 해달라면 뭐든지 다 해. 지금도 주문 들어오면 하죠. 목선반 주문 들어오면은 웬만한 건 다 할 수가 있으니까. 인천에는 저 중앙시장 안에 거기 ‘레몬트리’(카페)라고 거기 내가 해줬지. 배다리 중앙시장 안에 한복거리 있잖아요. 그 안에 가면 있어요.
                
스타벅스 강남점 내부


저기 어디야 을지로 있는 거 ‘수포교’ 그것도 하려고 그러다가 하도 일이 커서 그건 포기 했어.
애견 배변 봉투함 같은 거는 각 공원에 가면 다 있잖아요. 그런 것도 해놓은 거 있고. 월미공원 가도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직접 설치는 안 했는데 여기서 만들어만 주면 그 사람들이 갖고 가서 설치를 해.
   
애견배변봉투함
  
반려견 목줄 거치대


저기는 들어 봤어요?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 거기서 인천 맥주도 만들고 그러거든요, 신포동에. 거기 대표도 내가 잘 알아요. 그게 부평, 구월동, 논현동, 저 연수에 있고, 송도 신도시에 있고 인천에 있는 것만 한 일곱 개 돼. 어떻게 인연이 됐냐면, 옛날에 형제들이 퓨전 술집 했어요. 구월동에 ‘코소보’라고 술집이 있었는데 그 형제들이 지나가면서 “사장님 우리가 처음 시작하는데 좀 어려우니까 도와주세요.” 그래갖고 그때 좀 해주고. 그런데 지금 뭐 다들 무지하게 컸지. 나중에 체인점 할 때는 내가 다 해줬죠. 지금은 지방 부산 쪽에도 있지. 서울에도 한 몇 군데 되지. 천안, 서산 내려가서 상판을 다 해줬어. 그때가 아마 2006, 7년도 될 거야. 그 아우하고는 인연이 되다 보니까 결혼식 때도 내가 가고 그랬었지.맥학 협회라고 거기에 목침하고 복부 지압봉하고. 목침은 로구로로 깎아 갖고 반으로 쪼개고. 그래서 공정이 많이 걸려. 한 15년 했어요.
 
로구로 작품


야구 배트 그런 거는 좀 특이한 거죠. 어디 가도 똑같은 거 찾을 수가 없는 거죠.
(하나 깎는데) 한 20분 걸려요. 일반 사람들이 그냥 몇 개씩 해 가는 거지. 그렇게 전문 생산은 아니지. 송림동에서도 가끔 몇 개씩은 했죠. 동산학교 야구부 애들이 저거 뭐야 땅 고르는 거 있잖아요. 너가레라고 그러지, 그런 것도 해주고. 거기 상자 텃밭 그것도 해주고.우리 같은 경우는 누가 책장 짜 달라면 책장 짜주는 거고. 가구 짜 달라고 그러면 가구 짜주는 거지. 이거는 옷장 짤 거야. 이걸(설계도) 그려온 거야 그쪽에서. 치수가 나와 있으니까. 
      
    


6. 인맥은 나뭇가지처럼 튼튼하게 뻗어 나가 결실을 맺는다.
 
여기는 주로 원형 계단만 했거든요. 볼링장 일도 하는 게 있었고. 일은 선배님이 하던 게 여러 가지로 있어요. 그 선배님은 내가 스물 한 두세 살 그 정도부터 알았으니까 나하고는 40년 정도 됐죠. 변경인 사장님. 그때 형님이 손잡이 같은 거 로구로 공장을 하셨어요. 나도 한 열일곱 살 때부터 로구로를 했으니까 같은 계통이니까 그때 만난 거잖아. 형님하고는 한 거의 10살 정도 차이 나니까. 그때만 해도 10살 차이면은 아주 깍듯한 정도가 아니라 웬만하면 쳐다도 잘 못 볼 정도지. 그러니까 우리도 이쪽에 재개발 돼가지고 어디 얻을 만한 데도 없고, 그런데 형님이 생각해서.선배님이 몸이 안 좋으시고 연세도 있고 그러니까. 이제 “야 너 어차피 가게 얻어야 되면은 이쪽 오면 어떻겠냐. 여기 일도 있고 그러니 좋을 거다.” 보증금은 어차피 들어간 거고 여기 기계 시설을 해 놓은 것도 그냥 싸게 해서. 뭐 모르는 사람 같으면 몇 천 받아도 되는데 거래처까지 나한테 넘기면서 단돈 천만 원에 기곗값 정도만 해 갖고 “너가 해라.” 마음 먹고 권리금 달라고 그러면은 전기 시설한 것부터 다 일일이 기곗값 따지고, 자재 있는 거, 거래처까지 하게 되면은 돈이 꽤 되죠. 그래서 고맙죠. 거래처에 있던 거 내가 모르는 것도 가르쳐주고 그러지.

선배님들 조언을 많이 받으시고 이렇게 이전하셨는데 그분들에게 어떠한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는지.
저희 선배라고 한 세 사람 정도 있고 나머지는 동생들도 있고 친구도 있고. 그 사람들한테 내가 잘못한 것도 없고 잘한 것도 없고. 그냥 내 방식대로 하는 거지. 목재상 같은 경우 그 아우들도 나한테 자재도 싸게 주고. 일거리 있으면 소개도 시켜주고. 목재상에서 직접 그렇게 하니까, 이쪽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목재 같은 것들도 살 때 싸게도 사 오고. 목재는 용달차가 있으니까 북항 쪽에서 가서 직접 사 오는 거지. 북항 쪽 어디에 무슨 나무가 있다는 걸 내가 아니까. 가면 항상 있죠. 항상 있어요, 나무들.


7. 꿈은 소박하고 진실하게.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실까요?
원형 계단이나 목상자 저런 거는 계속해서 나갈 거 같애. 그리고 여기 사람들이 와 갖고 간단하게 몇만 원짜리고 해달라고 그러면 바로바로 해주고. 실질적으로 뭐 내가 전문적으로 배운 건 아니더라도 웬만한 건 샘플이 있으면 다 하고 어떻게 해달라고 하면 다 하고 그러니까. 종류는 해달라면 해주니까 헤아릴 수 없죠.
 
약서랍

오늘 저런 (행사용 비빔밥) 밥통 같은 거는 처음에 어떻게 생각해 갖고 짜냐 그거에 따라 틀리지. 저건 샘플도 안 주고, 사진도 안 주고, 그냥 생각해서 만들어 오래. 소래 축제하는 데 쓴대.
 
행사용 비빔밥통


앞으로 만들고 싶은 가구가 있으세요?
나는 의자를 좀 제대로 된 걸로 만들어 보고 싶어. 노후에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는 의자. 내가 다니던 회사가 의자 공장도 있었어요. 그 의자 공장에서 나온 한 40년 넘은 의자들이 아직도 쌩쌩하게 있는 게 평양옥에 있는 의자 그거하고, 저쪽에 가면은 신흥동에 가면 모듬 전골 그런 거 하는 데가 있어. 거기도 그 40년 된 의자하고 상판이 있더라고요. 아직까지 튼튼해. 근데 그렇게 오래 가면은 돈이 안 됩니다. (웃음)

하시는 일에 만족하시나요.
불만족은 없어요. 내가 그냥 성의껏 만들어 주면 되니까. 불만족하면 안 하면 되는데 간단해요. 앞으로의 계획은 이제 열심히 더 일하는 거죠. 그거밖에 더 있어요.

숭의 목공예마을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같이 모여 계시는 게 좋죠. 서로 일 같은 거는 협조들이 안 돼도 그래도 같이 있는 게 맞지. 근데 같이 협업할 만한 일들이 없어요. 마땅한 게. 자기 주특기들이 틀리니까. 지금 저 밑에 사람들 보고 계단하라고 그러면 못 하잖아. 박스 짜라고 해도 못하지. 저런 건 나만이 할 수 있는 거고.

사업을 확장하셨잖아요. 후대에 계승할 그런 마음이 있으세요?
안 하려고 그래요. 우리 애들은 이쪽으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까. 한 놈은 음악적으로 하고, 피아노. 한 놈은 이제 장사 쪽으로 하려고 그러고.

언제까지 일을 하실 건지
노후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계속 힘 닿는 데까지는 해야죠.


8. 개인적인 건강과 사랑하는 가족이야기 

제가 술을 보통 하루에 세 병씩 먹었어요. 두세 병씩. 지금은 안 먹은 지 몇 달 됐나. 술 먹다 보니까 일도 에러 나고 막 그러니까 ‘술 좀 안 먹고 한번 제대로 일을 해야지.’ 그러다 보면 손님들 다 놓치고 약속 안 지키고 안 되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아침에 눈 뜨면 그냥 세수하고 나오면 한 5시 반도 되고, 6시도 되고 늦어야 7시 안짝으로 나오니까. 한 달 보름 전 목 디스크가 좀 있었어요, 직업병이지.
이거 하면서 아픈 추억은 엄지손가락을 두 개 잘라 먹은 거. 잘라 먹었어도 살짝만 잘렸어서. 남들이 보면 우렁이 손톱 같죠. 발톱같이 생겨서 이게 톱에다 여기 잘라먹고 이쪽도 잘라지고.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저 결혼은 서른여섯이에요. 늦게 한데다가 이제 애들도 늦게 낳으니까 한 4년 만에 봤지. 애들이 지금 26이죠.

그때 좀 많이 늦으신 거 아니세요? 사모님 만나시게 된 계기 여쭤봐도 돼요.
나하고 아는 지인이 또 그쪽하고도 잘 알고, 서로 만나보라고 그래갖고, 그렇게.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습니다. 원래 자유인으로 살았는데, 속전속결이지. 나 만나러 왔을 때는 거의 스포츠(머리) 정도 됐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은 그때만 해도 단발머리를 좋아하고 그랬었는데 머리야 자라면 되니까 그건 큰 문제가 안 되죠. 그때야 다 좋지, 안 좋은 게 어디 있어.

일하실 때는 그럼 사모님이 와서 도와주세요?
집사람도 나름대로 바쁘죠. 장애인 활동 도우미 하고.

평소 사모님께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 있으시면 해주세요.
돈도 못 버는 신랑 만나서 고생만 직사하게 했는데 이제는 조금씩 나아질 거야. 이쪽으로 이사 와 가지고 많이 좋아지고 있으니까. 내가 이제 열심히 더 할 거니까. 작년 6월 7월부터 술도 안 먹고 그러니까. 일은 더 열심히 할 수 있어. 그래서 그전에 못 해줬던 거 느즈막에나마 해줄 수 있게끔 해야지.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김순옥, 허은영 (면담지원: 정지선, 표기자)
• 면담일시 : 2022.9.2. 17시 / 2022.9.21. 17시 / 2022.12.28. 13시
• 면담장소 : 명진공예사, 숭의목공예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