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조각의 무아지경의 매력을 느끼는 장인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3.01.17  | 최종수정일 2023.02.25



"조각을 시작하면 거기에다만 신경을 쓰니까 다른 것은 잊게 돼요. 무아지경(無我之境)이죠. 무아지경에 완전히 빠져 잡념이 없게 되지요. 사실 조각을 하다가 다른 생각은 못 하죠. 칼 가지고 하는 거니까 더더욱. 다른 생각 못 하고 그것에만 몰입하는 거예요. 그게 조각의 매력이죠."
 




1. 조각을 시작하고 현재까지의 과정

대표님 생년월일과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호적에는 1952년 1월 3일생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생일은 9월 24일입니다. 대부분은 호적을 늦게 신고하는데, 제 경우는 더 빠르게 표기되어 있답니다. 저는 강원도 평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우리 아버지가 ‘야 너는 서울을 가서 공부 좀 해라’하며 큰아버지한테 땅을 팔아서 줬는데, 그런데 큰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서 15살부터 남의 집에 머물면서 목공을 배우며 생계를 꾸려왔습니다. 제가 목공을 배우는 그 집은 큰아버지가 나무를 데 주는 집 중 한 집인데 그곳에서 밥 얻어먹으며 목공을 배우게 되었지요. 서울 옥수동인데 비가 많이 오면 침수가 잘 되는 동네여서 일하다 말고 지붕도 고쳐 주고, 문짝도 고쳐 주는 일도 했어요. 그때는 그곳 서울 옥수동이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워낙 시골에서 올라와가지고 갈 데가 없었지요. 남의 가게에 가서 일하고 밥 얻어먹고 그냥 일해주기도 하고 용돈을 조금 받기도 했어요. 그때는 돈보다도 먹고 사는 게 문제였었어요.

그러다가 어떻게 조각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견습공으로 해서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그랬죠. 그래도 싫지만은 않았어요. 이상한 기계로 자르고 조각칼로 조각해서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이 신기했어요. 처음 제가 본 것이 ‘기도하는 사람’ 이였을 거예요. 그게 신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시골 촌뜨기가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때는 요즘처럼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밥 얻어먹으면서 하기도 하고 돈을 받기도 하면서 되는대로 남의 집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20대에는 친구와 동업으로 가구 만드는 공장을 경영해 보기도 했는데 별로 재미는 못 보았지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나무 냄새를 좋아했어요. 20대에 공장 경영에 실패하고 남의 목공 가게에 들어가 그 당시에 유행인 벽걸이 조각을 배웠죠. 호랑이 조각, 사슴 조각, 우산 안에 두 연인이 있는 조각 등을 했어요. 글씨 조각은 나중에 했고 20대에는 거의 벽걸이 작품을 많이 했었죠. 그러다 일본에 수출하는 불단 조각을 했어요. 일본에서 오더(주문)를 줘 가지고 한국에서 하는 것인데 거기서 월급제로도 있으며 불단 조각을 배우고 직접 했어요. 그러다 20대 후반에는 절에서 숙식하면서 하는 절 조각을 배워 하게 되었지요.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각가들이 함께 큰 작품을 했어요. 절 조각의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커다란 목불(木佛)이지요. 제가 목불 조각을 한 곳은 전북 김제 금산사 절에서도 했고, 지리산 실상사에서도 했고, 오대산에 들어가서도 했죠. 보통 목불상을 만드는 데는 몇 달이 걸리는 대작이지요. 단체로 불상에 매달려 조각을 해야 하니 개인적인 자유는 없었지만 조각하는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평온했어요.

그럼 30대 때 대표님의 생활을 말씀해주세요.
30대 초반에는 배다리에서 목공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제 나이 서른두 살에 결혼을 하며 배다리에 정착하게 되었지요. 결혼을 몇 년도에 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1983년쯤) 배다리 시절부터 저의 목공 활동에 있어서 정착기라고 봐도 되겠지요. 그전에도 조각을 배우고 했어도 왔다 갔다 하면서 했으니까요. 옛날엔 거의 다 그랬잖아요. 배다리에서 일하시던 때가 30대 초반이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정도 되겠어요. 배다리에 살면서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이제는 둘 다 결혼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려가고 있어요. 가족들은 제가 하는 일을 생계를 이끌어 주었으니 이해하고 인정해 주지요. 제 자식들은 제가 하는 조각에 큰 관심을 보이거나 물려받을 생각이 없는 듯해요. 근래에 와서 목공예가 힘들 뿐만이 아니라 수입 보장이 안 되는 힘든 노동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저는 그만 둘래도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70살이 될 때까지 다른 일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다른 일을 해도 나무 냄새가 좋고 손에서 느끼는 나무 숨결이 좋아 나무 관련 일을 쭉 해 왔거든요.

대표님께서 20대에는 절 조각 일을 하시고, 그다음에 30대 초반에 인천에서 자리 잡아 결혼하시고 조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고 했는데, 현재까지 무엇을 하셨는지 차례대로 말씀해주세요.
저는 그동안 목재를 다루는 일을 쭉 해왔고, 목공 여러 분야 중 가구 조각을 많이 했어요. 20대 중반에는 가구 공장에서 일을 많이 했어요. 예전에는 주로 농(장롱欌籠)을 많이 했거든요. 가구업체는 당시에 있었던 보르네오, 동서, 라자, 삼익 등과 같은 가구 회사지요. 처음엔 종업원으로 하다가 내가 직접 시작해서 하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직접 목공 쪽 오너로 시작한 지는 30년쯤 된 것 같아요. 대형 가구 업체 하청을 받아 운영하기도 했지요. 그때는 수입이 좋았어요. 배다리에 사업장을 가졌을 때 상호는 ‘대흥공예’ 였어요. 배다리 사업장이 헐리면서 이곳 숭의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이 라인 건너편 삼거리 코너에 거기서 ‘대흥공예’란 가게를 운영하다가…. 여기서 그만두고 석남동으로 갔었어요. 석남동 가서도 목공 가게를 계속했어요. 쭉 조각 일을 해 와서 같은 조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지요. 지금 숭의 목공거리에 있는 분들과도 친분이 깊어요. 숭의동에서 목공 가게를 할 때는 동생들도 같이했었는데, 동생이 교통사고 나고 그러는 바람에 여기 숭의동을 접고 석남동으로 갔지요. 석남동에서 10년 넘게 했는데 IMF가 터진 거예요. IMF가 딱 터지니까 돈 받아야 되는 곳에서 돈을 줄 형편이 안 되니 돈줄이 막힌 겁니다.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해서 버티다 못해 결국 집을 팔아 직원 월급은 주었어요. 힘들었어요. 그 후 목공 가게는 한 1~2년 쉬었어요.

IMF때 가게를 접고 쉬는 동안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IMF로 쉬고 있을 때 인간문화재 허길량 장인에게 도와 달라는 요청이 와서 처음엔 석남동에서 파주로 출퇴근을 했어요. 자세히는 따져보지 않아 모르겠는데…. 이분과 한 13~15년을 함께한 것 같아요. 허길량 장인은 불교 조각을 하는 분으로 불교미술원을 운영하셨어요. 아마 이분은 2001년인가 그쯤 해서 국가 인간문화재 목조각장으로 인정받았을 거예요. 저는 그분 밑에서 조각을 배우고 도와드렸지요. 제가 허장인 보다 1살 나이는 많았던 것 같았지만 허길량 장인은 작품 전시회도 여러 번 가졌어요. 그분 전시회 도록(圖錄) 맨 뒤에 보면 함께 한 사람들 사진이 있지요. 저도 있고 그때 함께 한 조각가들이 이렇게 여러 사진에 있잖아요.

대표님께서 목공 하실 때 나무는 어디서 받아오세요?
제가 예전에 목공을 할 때는 원목을 켜서 썼어요. 원목을 제재소에서 사다가 켜고 말려서 쓰고 그랬거든요. 돈이 많이 드니까 반제품을 사다가 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처럼 다듬어진 나무가 아니죠. 그런 건 예전엔 없었죠. 배다리에서 목공 가게를 할 때, 배다리 쪽엔 목공소도 있었지만 다른 것들도 많았어요. 문짝 하는 데도 있고, 인테리어 하는 곳도 있고, 맨 그런 나무와 관련된 가게가 많고 만드는 데가 많았지요. 배다리에 죽제(竹堤)도 있었고, 합판, 함석 같은 것도 있었어요. 또 큰 가구를 할 때는 아줌마들한테 외주를 주기도 했어요. 농에 장식을 하는 상감(象嵌)을 주기도 하고 얇은 나무를 오려 붙이기도 일을 외주로 주기도 했어요. 저는 외주는 안 주었어요. 제가 목공을 하면서 사용하는 도구는 다양해요. 보시다시피 400자루가 넘는 조각칼을 가장 많이 사용하지요. 또 스카시하고, 그다음에 마루노꼬, 루터도 있고, 대패도 있고 많은 공구를 사용해 가며 작품을 완성해요. 
목공 폐자재 처리 방법은 지금처럼 겨울에는 난로의 연료로 쓰면 됩니다. 다른 폐자재는 뭐 쓰레기봉투에 넣어가지고 버려야죠. 그래도 목공은 폐자재가 유해성분이나 유독 성분이 적은 편이지요. 그 때문인지 목공을 하면서 얻은 직업병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앉아서 깎으니 편하고, 톱밥과 먼지가 몸으로 들어가도 돼지고기에 소주 먹고 나면 괜찮더라고요. 나무 먼지가 돌가루 먼지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모양이에요. (웃음) 아직까지 큰 병이 없는 거 보면은요. 다만 작업하다 보면 손을 다치는 일은 종종 있어요. 이 손의 상처는 19살 때 다쳤는데 그때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썩도록 내둬서 이렇게 됐죠. 다쳐서 접합을 했는데 상처가 남아 있어요. 이 상처로 겨울이 되면 유독 이 부분 손가락이 시려요. 목공은 기계를 다루는 직업이라 손에 상처가 많아요.

 
사용하는 조각칼



2. 조각에 심취하다
대표님의 기억에 남는 목공 경험은 무엇인가요?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목공 경험이라면 32살인가 33살에 전주 불교회관에서 했던 불상 조각입니다. 그리고 20대에 오대산에서 공장을 할 때 조각 관련 기능대회를 나갔었지요. 잘했다고 상도 받았어요. 상가에 파는 기념품을 조각했는데 벽에 거는 벽걸이를 조각을 많이 했어요. 호랑이 조각, 사슴 조각을 했던 시절이네요. 근 30년은 넘은 것 같아요. 그때 함께 한 친구는 아직도 오대산 근방인 속초에 살아요.
무엇보다도 IMF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파주로 출퇴근하며 절 조각을 배우면서 인간문화재 허길량 씨뿐만 아니라 조각의 명수들과 함께 조각한 일과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 배운 절 조각이 제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 인연으로 불상 조각 오더를 주로 받게 되고 조각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지요.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조각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조각은 참 재미있습니다. 죽은 나무에서 이렇게 살아 움직일 것 같은 하늘로 올라가는 비천상이 나오잖아요. 여기 이 비천상. 제가 조각했어요. 이것을 내가 혼자 한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만들었죠.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제 솜씨도 늘고 배울 것도 많아요. 이 작품은 관음상이에요. 머리에 관을 썼다고 관음이라 부르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몰라요. 근데 이렇게 관 쓰고 있으면 관음보살이라고 하고, 손 모양 등 다른 특징에 따라 부처님을 부르는 명칭이 다양해요. 지장보살, 아미타보살, 미륵보살, 무슨 보살 등 다양해요. 워낙 많아요. 조각을 시작하면 거기에다만 신경을 쓰니까 다른 것은 잊게 돼요. 무아지경(無我之境)이죠. 무아지경에 완전히 빠져 잡념이 없게 되지요. 사실 조각을 하다가 다른 생각은 못 하죠. 칼 가지고 하는 거니까 더더욱. 다른 생각 못 하고 그것에만 몰입하는 거예요. 그게 조각의 매력이죠. 이렇게 내가 한 작품이지, 처음과는 달라진 새로운 형태로 나오면 너무 뿌듯하고 기쁘지요. 생각해 보세요. 그 네모난 나무에 이런 관음상이 숨어 있다가 조각가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거잖아요. 조각을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참 보람되죠. 무엇보다도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몰입하는 조각의 과정이 참 좋지요. 조각은 무아지경의 매력을 느끼는 작업이지요.




3. 목공예마을의 미래와 바람

이곳 숭의 목공예마을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나요?
최근 파주에서 하던 일이 부도가 난 후 2년 정도 쉬다가 여기 숭의동에 가게가 돼 가지고 오게 되었어요. 집에서 쉬어보니 하루가 길고 힘들더라고요. 그러던 중 전에 여기서 ‘인일조각’이란 간판을 걸고 목공 일을 하시던 진교욱 사장님께서 저에게 작업실을 인계하셨지요. 진교욱 사장님과는 전부터 인연이 있었어요. 정교한 조각 관련 일이 들어오면 제게 넘겨주며 함께 상부상조했었지요. 그러니까 진교욱 사장님과는 예전부터 친분이 깊은 사이로 나한테 전부터 가게를 인수하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내가 안 한다고 그랬었어요. 그러다 노는 게 조금 길어지니까 지루해서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숭의동 목공마을로 들어왔어요. 여기서 가겟세나 내며 소일하고 싶어 이곳으로 왔지요. 남들은 쉬라고 말하는데 저는 이렇게 나와 일하는 것이 위안이 되고 참 좋아요. 간판을 왜 안 바꾸느냐고요? 이유는 없어요. 간판을 바꿔볼까 해서 떼어 보려 했더니 타이루(타일)가 전부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래도 나중에 바꿀까 싶어 두었어요. 일단 그냥 사용하려고요. 저는 전에 배다리에서는 ‘대흥공예사’를 했고, 숭의동 이사 와서도 ‘대흥공예사’로 했었지만, 석남동에서는 ‘동경공예사’로 했어요. 간판은 천천히 고민해 보려고요. 아직 간판에 대한 애착은 없어요.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목공예마을의 전통을 잇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요?
제가 볼 때 목공예는 침체 되어 사양길에 접어든 듯해요.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해요. 숭의동 목공센터에 와서 교육받는 사람들을 보면 취미로 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직업으로 전문적으로 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목공을 취미로 한다면 재미도 있어 괜찮아요. 그러나 먹고 살려고 하면은 너무 힘들어요. 힘든 고생뿐만이 아니라 수입을 보장하기 어려워요. 최근 손으로 만든 수공예다 해서 가격은 쎄지긴 했지만 많은 양을 구입하는 사람은 없어요. 옛날에는 한 번 하면 몇백만 원씩 해달라며 주문량도 많고 해서 수입이 되었는데, 지금은 주문이 거의 없어요. 그냥 한두 개 쓴다고 주문하는 정도예요. 최근에는 종교재단이나 목공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이 부탁하는 정도지요. 조각 예술품 같은 것은 돈 있는 사람이 부탁한 거죠. 목공작품도 예술도 돈이 있어야 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요. 최근에는 목공 대기업에서 애들 블록 맞추기 하듯 해서 반제품을 팔기도 하더라고요. 일반인들이 조립하는 과정에서 나름 만드는 즐거움도 느끼고 자기가 만들었다는 성취감도 느낄 수 있어 많이 애용하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 같은 수공업은 이런 대기업과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지요. 이러다 보니까 우리나라 목공 기술업이 침체기죠. 공인의 손때 묻은 개성 있는 작품에 대한 애호 정신이 못내 아쉽지요. 생계가 안 되는데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있겠어요? 특히 이 계통은 손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마무리가 되는 기술인데 명맥이 유지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럼 숭의 목공예마을의 발전 방안은 무엇일까요?
지금 숭의동 목공마을에 있는 기술자들은 경력이 최소 20~40년이 넘어요. 다들 고령자가 되었지요. 그러기 때문에 체력이 있는 한, 기존 단골들 확보로 그냥그냥 유지가 될 거예요. 제가 다시 숭의 목공마을로 돌아온 것은 돈을 벌기보다는 목공마을에서 못하는 것을 내가 좀 해 주며 작은 일이라도 하며 소일하려고 왔어요. 일을 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좋은 거죠. 숭의 목공마을이 전통을 이으려면 어떤 식으로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답을 한다면 어떤 식보다도 국가에서 신경을 좀 써주었으면 싶어요. 국가나 시에서 임대료를 보조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절실하지요. 아무래도 가게 임대료가 비싼 데는 집세 내기도 빠듯하거든요. 그래도 여기는 싼 편이긴 해요. 한 500만 원에 3~40만 원 월세인데, 일 없을 때는 그것도 내기가 벅차거든요. 또 목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목공을 교육하는 목공센터 프로그램도 지원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곳이 목공을 배울 수 있는 학교 같은 데가 되면 사람들이 찾게 되고, 서울 인사동처럼 고유한 특성을 지닌 곳이 되면 사람들도 찾게 되지 않을까요? 선진국 같은 데는 가업으로 빵 가게, 국수 가게도 쭉 이어간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전통은 희귀한듯해요. 저도 내 자식들이 좀 더 편하게 살게끔 하고 싶지 이런 힘든 목공 가르치고 싶지는 않아요. 돈벌이 전망도 어두워요. 그래도 저는 이 동네, 목공마을이 잘 됐으면 좋겠죠. 여기 공예 하는 사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모두 잘 되면 좋겠어요. 돈벌이도 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일하면 좋겠어요. 여기 목공마을이 활성화되면 좋겠는데 많이 안타까워요.

마지막으로, 대표님은 앞으로 어떤 장인으로 남고 싶으세요? 그리고 목공하는 후배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제가 어떤 장인으로 남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어요. 그냥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 내가 움직일 수 있으면 그냥 이렇게 내 할 일 하면서 지내면 좋은 거 같아요. 목공 하는 후배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이라면, 글쎄요. 하여간 어디서라도 자기 직업 열심히 일하면 그게 좋지 않을까요.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김용경
• 면담일시 : 2022.12.6.
• 면담장소 : 인일조각